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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에서 살아남은 미국인 고아의 실화(3)

편집부  |  201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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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다시 미국 연락처에 진입
 
한슈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권 취득 날이 가까워진 어느 날 공안 경찰이 공장에 나타났다. ‘마음대로 미국 연락처에 진입했다’고 경고하며 2개의 금지 사항을 말했다.


첫째, 미국 연락처 출입을 금하며 미국 연락처 관계자와 연락도 금한다. 둘째, 거리에서 우연히 그들과 만나도 그들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 위반했을 경우는 처벌하겠다고 했다. 이후 매일, 한 명의 경관이 공장 내에서 그녀를 지키게 되었다. 그녀보다 빨리 공장에 나타나 매일 그녀를 집까지 ‘호송’했다.
 

한 달이 지났다. 그 날 아침, 나가기 전부터 한 명의 경관이 자택 앞에서 감시했고 집을 나와 걷는 길가에는 많은 경관이 배치되었다. 한슈는 마음속으로 한탄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여권 수취일이 지나 버렸다. 한슈는 틈을 내 공중전화로 외웠던 5개의 번호에 계속 전화를 걸었다. 베이징 시내 전화는 각국의 재외 공관과는 다른 회선 시스템이기 때문에 연결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로부터 물건을 사오라는 부탁을 받은 그녀는 긴 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문득 상점 주방 벽에 걸려 있는 낡은 분리식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점주에게 전화를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돈을 건넨 후,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돌리자 전화가 연결되었다. 수화기의 저 편에서 오그덴 영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여권은 이미 완성됐습니다.”
 

“내일 아침 8시에 미국 연락처 부근에 가겠습니다.”
 

다음 날 새벽 4시에 일어난 한슈는 평상복 차림으로 열차를 탔다. 현에 도착 후 연락처 부근 병원으로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탔다. 미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병원에 도착한 후 그녀는 환자들 무리에 섞여 병원 안에 무장 경관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미국 연락처는 50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인파에 섞여 병원을 나왔다. 도로를 횡단해 첫 번째 무장 경관을 지나치고 두 번째 경관쪽으로 향할 때, 멀리 오그덴 영사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그녀의 여권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영사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들어 왔다
 

“그녀는 여권을 받으러 왔다. 여권은 여기 있다.” 영사는 여권을 가리키며 무장 경관에게 말했다.
 

그 틈에 한슈는 미국 연락처로 뛰어 들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감시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이 나타나면 곧바로 마중하러 갈 생각이었다.” 영사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빨리 서명하라. 서명해야 여권이 유효하게 된다.” 한슈는 자신의 이름을 썼다.
 

“지금 당신은 합법적인 여권을 가진 미국 국민이 되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귀국을 실현시킬 것이다.”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공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여권과 출생증명서를 베개 속에 넣어두었다. 밤에는 창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고 옥상에도 누군가 걷고 있는 소리가 났다. 다급해진 한슈는 출생증명서를 속옷에 숨겼다.
 

경찰이 집에 난입했다. 그녀를 체포한다며 승용차에 밀어 넣었다. 3시간에 걸쳐 조사가 계속 되었지만, 그녀는 기민하고 단단한 태도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한슈는 석방됐지만, 여권과 출생증명서는 다시 강제 압수되었다.
 

8개월간 그녀는 강한 정신력으로 당국의 조사에 임했다. 담당자의 직책도 높아졌다. 그녀는 상대에게 결코 어떠한 구실도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오그덴 영사도 매주 중국 외교부를 방문해 한슈의 미국 귀국을 요구했다. 오그덴 영사는 당시 자신은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당시 심정을 밝혔다. ‘한슈가 살아 있다면 대면시켜라. 죽어 있다면 시체를 보여라’고 당국에 말했다.
 

1977년 여름 미국 바스 국무장관이 방중했을 당시, 미중 외교 관계 체결이 의제가 되었다. 중국에 놔둘 수 있었던 미국인에 대해 양국 정부는 뒤얽힌 교섭을 했다. 그 결과, “나는 케이크처럼 선물로 미국에 건네졌다”라고 한슈는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그녀는 간신히 ‘친족 방문을 위한 귀국’이 허용됐다. 즉, 중국 여권으로 중국을 떠나 미국에 귀국한 것이다. 중국을 떠날 수 있으면 미국 정부는 어느 여권을 사용할까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미국 입국 심사시 미국 여권을 제시하면 끝나는 것이다.
 

그녀는 무사히 홍콩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 홍콩 미국 영사의 도움을 얻어, 같은 날 미국 시애틀에 도착해 워싱턴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예기치 못한 재회
 

그녀는 간신히 미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많은 고난을 참아 온 고아를 조국은 양손을 펼쳐 기분 좋게 가슴에 꼭 껴안아 주었다. 홍콩 영사가 영어를 모르는 그녀를 위해 준비해 준 몇 통의 편지에 의지해 그녀는 무사히 미국 국무부 중국과에 도착했다. 그들은 유창한 중국어로 ‘지금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열심히 도우려고 했다. 국무부의 도움으로 그녀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알링턴시 정부는 3개월간의 생활비를 지급해 주었다. 곧 그녀는 국무부 관할의 외교 학원에 중국어 교사로서 추천되었다. 국무부 관리는 일부러 해당 학원 학장에게 전화해 반드시 한슈를 채용할 것을 부탁했다.
 

학장은 조금 불쾌하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반드시 채용해 달라는 ‘명령’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중국어 교사를 직접 면접하겠다고 말했다.
 

면접날 아침 한슈는 약속 시간에 맞춰 학장 사무실을 방문했다. 배운지 얼마 안 된 영어로, “Good morning, Mr. Sweft” 라고 인사했다.

 
금테 안경을 쓴 학자 풍모의 학장은 한슈를 보고 돌연 안경을 벗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넘쳤다. 한슈는 자신의 영어가 잘못돼 이 노인을 화나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어진 학장의 말에 한슈는 더 놀랐다.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아들 존이 당신과 함께 중국에 갔었다”


“당신이었습니까?” 

 

한슈의 눈에서도 눈물이 넘쳐 흘렀다.
 

                     •   •   •   •


1982년부터 한슈는 글을 쓰기 시작해, 현재는 중국 외 지역에서 저명한 중국어 작가가 되었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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