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북이적정권 교체가 자주국방의 첫 걸음
자주국방은 하드웨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할 의지를 가진 국가전쟁지도부를 형성하는 것이 ‘자주국방’의 첫 걸음이다.
아편전쟁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광주(廣州)에 이른 영국 함대는 호문-천비 요새를 점령한 후, 함대를 광동성 밑으로 진출시켜 포격을 가했다. 포탄은 정확하게 청군(淸軍)의 진지들을 타격했다. 멀리 해상에 떠 있어 파도에 요동치는 함선에서 그토록 정확하게 포격을 가한다는 것은 청군에게는 일대 경이였다.
청군 사령관 혁산은 영국군의 놀라운 포격술이 요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혁산에서 요술의 힘을 없애는 민간의 비방(秘方)을 진언했다. 그에 따라 혁산은 요술의 힘을 없애기 위해 돼지와 양의 피, 오물들을 수거해다가 광동성 안 곳곳에 뿌려 놓았다.
그런다고 영국군의 요술(?)이 없어지나?
비방에도 영국군의 정확한 포격은 계속됐고, 결국 청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할양하고 광주-상해 등 5개 항구를 개방하는 등 영국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어야 했다. 중국의 반(半)식민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어 러시아는 연해주를 사취했고, 프랑스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무시하고 월남을 식민지로 삼았다.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 천하를 흔들었다.
양무운동
1861년 함풍제가 죽고, 동치제가 즉위했다. 새 황제의 어머니인 서(西)황후가 수렴청정을 했지만, 실권은 공친왕이 쥐었다.
애로우호 전쟁 등을 겪으면서 서양문물의 우수함을 깨닫고 있던 공친왕은 이홍장-증국번 등 한인(漢人) 관료들을 이끌고 자강(自彊)운동을 일으켰다. 이를 위한 추진기구로 서양과의 교섭과 문물 도입을 위한 기구로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설치했다.
이후 30여년간 중국은 서양식 군함과 대포를 사들이고, 기술을 도입해 군함과 대포를 생산하고, 유학생들을 서양으로 파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이른바 ‘양무(洋務)’운동이다.
양무운동의 결과 특히 군사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북양함대를 중심으로 세계7위의 해군국(海軍國)으로 성장한 것이다.
청나라 상층부는 자신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회의적인 사람도 없지 않았다. 주영대사를 지낸 곽숭도 같은 이들은 “튼튼한 배와 강한 대포는 아주 하찮은 일이다. 정치제도가 입국(立國)의 근본이다. 중국의 큰 근심은 사대부에게 식견이 없다는데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조상을 잊은 매국노’라는 비난이었다.
청일전쟁
청나라의 성취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여지없이 폭로됐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청군은 육군, 해군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무너져내렸다.
아산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후 평양성으로 후퇴한 청나라 육군의 경우, 사령관 엽지초는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관료출신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해하는 자였다. 관료 출신 장교들은 술과 아편에 절어 있었다. 병사들은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한번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청군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별 힘 들이지 않고 요동으로 진군했다.
한심하기는 해군도 마찬가지엿다. 전함 20척, 포함 2척, 어뢰정 4척으로 구성된 북양함대는 서해에서 비슷한 규모의 일본함대와 조우했다.
우선 지휘부의 의견이 엇갈렸다. 사령관 정여창은 일자진(一字陣)을 펴도록 지시했지만, 부사령관 유보섬은 그럴 경우 기함(旗艦)이 위험해진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인자진(人字陣)을 치도록 지시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항명이었다.
기함 정원호가 첫 발포를 하려는 순간 함교(艦橋)가 무너졌다. 함교가 무너진 것은 지난 수년간 이를 제대로 손보지 않아 부식(腐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은 예산부족 때문이었다. 해군의 예산이 부족했던 것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서태후가 별장인 원명원을 짓는다고 해군 예산 1000만냥을 전용했기 때문이었다.
기함 정원호의 함교에서 함대를 지휘하던 사령관 정여창은 갑판으로 떨어지면서 허리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함대 군사고문이던 영국인 타일러도 기절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령관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으니, 그 전투가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다섯 시간 후 청군은 전함 다섯 척이 침몰하고, 나머지 배들도 크게 파손되는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일본해군은 기함에 약간의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
남은 청나라 군함들은 기항인 위해위로 철수했다. 위해위에는 전함 7척, 포함6척, 어뢰정 13척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위해위로 군대를 상륙시키는 한편, 어뢰정을 이용한 공격을 계속해 정원호를 좌초시키고, 내원호와 위원호를 격침시켰다. 북양함대의 주력전함들이 모조리 무력화됐다.
이런 상황 아래서도 내원호와 위원호의 함장들은 태연자약했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자기들의 배가 격침되던 그 순간, 육지에서 여자들을 끼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군 상층부의 지역감정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청군의 주력인 북양함대가 무너지는데도, 다른 지역 출신 군벌들은 이홍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북양군벌의 해체를 내심 기뻐하면서 지원하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북향함대 사령부가 있는 유공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혼돈 속에서 수병들은 육지로 달아나는데, 반란을 맞은 육군은 배로 달아나 목숨을 구하려 발버둥쳤다.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은 배들을 자침(自沈)시킨 후 일본군에 항복하려 했다. 하지만 함장들은 배를 일본군에 넘겨주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침명령을 거부했다. 정여창은 남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군의 포위망을 정면돌파할까 했으나, 부하들은 이 마저 거부했다. 모든 선택이 가로막힌 정여창은 결국 음독자살했다. 남은 함대는 일본군에 항복했다.
북양함대의 궤멸과 함께 청일전쟁도 끝났다. 무엇보다도 청나라 정부는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눈앞에 다가온 서태후의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청나라는 1895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치욕적인 강화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섬나라 오랑캐’로 깔보던 일본에게마저 패하면서 중국은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병든 사자’임이 만천하에 입증됐다. 그로부터 16년 후 청나라는 무너졌다.
양무운동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일종의 근대화 운동이자, 자주국방운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배와 대포’라는 껍데기에 집착하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 ‘배와 대포’를 운용할 수 있는 인력과 노하우, 그 인력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이 부재(不在)한 상태에서, 양무운동은 ‘껍데기 근대화’,‘껍데기 자주국방’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이 곽숭도가 경고했던 것처럼 한 나라의 부강은 ‘배와 대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주국방은 하드웨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돌려 우리의 현실을 보자.
노무현 정권은 ‘작전권 환수(’작전권 단독행사‘가 정확한 표현이지만)를 추진하면서 “그렇게 해야 하고, 우리가 그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주국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호크 정찰기 도입, 군사위성 발사, 이지스함 건조, 패트리어트 미사일 도입, 국산 순항미사일 개발 등등 수백조원에 달하는 전력(戰力)증강사업도 약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하드웨어’측면에서의 전력증강이 이루어진다고 한들, 그것만으로 자주국방이 가능할까?
우선 북핵문제에 대처하는 당국자들의 모습을 보면, 하드웨어가 국가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님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리랑 위성은 정찰위성의 기능도 갖도록 되어 있었지만, 핵실험 예상지역을 촬영하도록 지상에서 지시하지 않는 한 해당지역을 촬영할 수 없었다. 북한의 핵보유 사실을 기를 쓰고 외면해 온 이 정권 아래서 북한지역에 대한 위성정찰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가의 장비를 보유한 지진관측소도 핵실험 장소를 헛짚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방사능 누출은 없었다’는 등 헛소리를 했다. 그들은 며칠 뒤에야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했다.
이런 잘못들은 ‘햇볕정책’이라는 잘못된 정책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고, 장비들을 운용하는 노하우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고가의 정찰기와 이지스함과 최신예전폭기들을 사오거나, 만든다고 해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국가전쟁지도부가 북한을 자극할까 두려워 그런 장비들의 적극적 운용을 꺼릴 경우, 예산 부족 등으로 장비들을 제대로 유지보수하지 못할 경우, 장병들의 노하우 부족으로 장비들을 썩힐 경우, 그런 최신 장비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전교조 교사들의 친북교육에 오염되고, 주적개념을 상실한 장병들이 유사시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과거 서해교전이나 DMZ에서의 소규모 충돌시, 장병들은 제 몫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몸 바쳐 싸운 장병들은 찬밥신세가 되어 버렸다.
만일 북한이 미사일과 장서정포를 쏴대면서 휴전선에서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할 경우, 그때도 우리 병사들이 잘 싸울 수 있을까? ‘곧 통일이 될 텐데, 왜 몸 바쳐 같은 민족과 싸워야 하나?’하는 생각으로 꽁무니를 빼지는 않을까?
장교와 지휘관들은? 제1차서해교전에서 제대로 싸운 함대사령관은 좌천됐다가 옷을 벗어야 했다. 2차 서해교전의 실상이나 그 후 북한 함정의 NLL침범 실상을 은폐하려는 정권에 맞서 진실을 알렸던 정보책임자들도 옷을 벗어야 했다. 이제 어느 지휘관이 자신의 직을 걸고 적과 맞서 싸우겠는가?
친북이적정권 교체가 자주국방의 첫걸음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국가전쟁지도부의 의지이다. 노무현 정권과 열린당은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고,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로 대북제재를 외치는 상황 아래서도, 한사코 ‘햇볕정책’인지 ‘평화번영정책’인지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금강산 파이팅’을 외쳐대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계속 추진을 공언하고, “당근만이 아니라 채찍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그럼 전쟁하자는 소리냐?”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들은 국민들 몰래 미국의 핵우산까지 제거하려 획책하기까지 했다.
그런 자들에게 과연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있을까? 그들에게 유사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국가에 대한 애정과 국가수호의지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국가전쟁지도부에 수백조원어치의 값비싼 무기를 쥐어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정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할 의지를 가진 국가전쟁지도부를 형성하는 것, 다시 말해 무능하고 부패한 친북이적정권을 몰아내고, 유능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헌법에 충성하는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자주국방’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