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조선사><일본사>는 언제 재편되었나?
우리는 지금 력사전쟁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중국대륙에서는 <중국사>라는 이름으로 동북삼성이 만주라고 하면서, 그곳이 고조선, 기자조선, ...,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나라라고 하면서, 그래서 그곳이 고구려 땅이었고, 중국사의 변방사라고 하면서, 그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언필칭 동북공정이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그 동북삼성이 고구려 땅이지만, 중국사의 변방이 아니고, 오로지 고구려 땅이었고, 조선으로 이어진 나라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동북삼성이 만주이고, 대한민국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일본렬도에서 꿀먹은 벙어리인 양, 동북삼성이 만주이고, 그들이 세웠던 만주국의 땅이라고 하면서, 일본렬도와 함께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일본사의 터전이라고 한다.
이런 일련의 주장된 말들이 맞겠는가?
우리는 일본인이 쓴 일본책이라면 거의 신경질적으로 거부반응한다.
그러나 신경질 낸다고 해서 나의 주장이 관철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주장의 관철은 오직 론리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런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보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지은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서울: 시인사, 1986), pp. 61-63에 보면, 다음과 같은 회의록이 적혀있다. 물론 뒷편에 일본어로 실려있다.
제목: 조선사 편수회 제8차 회의
일시: 1934년(昭和9) 7월 30일
장소: 중추원
참가자: 회장 금정전(今井田), 고문 흑판(黑板), 어윤용(魚允用), 기타 위원 및 간사 도엽(稻葉)
도엽 간사: <조선사> 발간예정 총 책수는 1929년(소화4) 12월 23일(제3차 위원회)에 1책당 500페이지 정도 35책으로 늘리고자 한다.
흑판 고문: <조선사>의 마지막 부분은 1894년(갑오)까지로 하고, ... 조선사편수회 업무는 예정대로 1936년 3월까지로 마감한다.
최남선 위원: ..., 다음으로 단군과 기자 항목은 <조선사>의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 편찬의 <조선사>에서는 그것을 수록하게 되어 있는 제1편 할주(割注)인가, 두주(頭注)로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잔무를 정리하는 경우에 정편(正篇)이나, 혹은 보편(補篇)으로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항을 편찬했으면 합니다.
도엽 간사: 지금 최 위원으로부터 본회와 같은 사업은 두번 다시 착수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충분히 음미하여 완전한 것을 만들었으면 하는 말씀이 계셨는데,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최남선 위원: 단군과 기자는 역사적 실재 인물인가, 신화적 인물인가. 그것은 하나의 연구과제입니다만, 적어도 조선인 사이에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 인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회 편찬의 <조선사>에는 그것을 집어넣지 않은 것은 우리들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도엽 간사: 제1편 <조선사>항목에 단군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단군에 관한 기사가 편찬작업의 기본사료로 결정, 채택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기자에 관한 기사는 이미 중국측 사료 속에서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군에 관해서는 고려 공민왕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가 단군연대에 관해서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 때에 단군을 제사모시는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3 사람사이의 대화에서 참으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회의를 실시한 시기가 1934년이라는 것이다.
둘째, 조선사 편수회에서 <조선사>를 편수해내면서, 그 속에 <중국사>까지 이미 정리하여놓았다는 것이다. "이미"라는 말은 1934년 이전이라는 말이다. 이런 증거로 보면, <중국 24사>(백납본)이 1932년(中華民國 21)에 상해(上海)에서 영인했던 것을 보면 역시 1932년 이전에 <중국사> 작업이 동일한 위치에서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셋째, "단군, 기자"에 관한 사료는 <조선사>에서 다루지 않고 일부를 <중국사>에서 충분히 다루었다는 것이다.
넷째, 단군, 기자 기사가 <삼국사기>에 빠져있다는 말은 김부식이 <삼국사>를 지으면서 애초에 다루지 않은 것으로 했지만, 사실은 조선사편수회에서 그들이 <삼국사기>라는 이름으로 고치면서 그들이 그것을 삭제해버렸다는 말과 같다.
다섯째, "편수회(編修會)"라는 말이 말해주듯이 "조선의 력사를 편찬하고 수정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하나의 <조선사>를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장소에서 <중국사(중국대륙)><조선사(한반도)>(일본사(일본렬도)>로 나누어 편수하였다는 말이다.
우리는 <중국사>는 중국왕조라고 만들어놓은 그 시기마다 중국대륙 사람들이 편찬했고, <일본사>는 내용을 왜곡했든 아니든, 일본사람들이 편찬했고, <조선사>는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을 억지로라도 참여시켜 한반도 서울에서 한반도의 력사로 축소왜곡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1934년 조선사 편수회 제8차 회의에서 알 수 있다. 특히 마지막 도엽 간사와 최남선 편수위원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참으로 중요하며, 이것은 곧 동시에, 동일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3가지[중국, 한반도, 일본렬도, 즉 대륙 중국사, 반도 조선사, 렬도 일본사]의 력사로 나누어 작업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곳이 중국대륙 상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