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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의 잃어버린 20년 (하편)
이름 : 똥국맛짱
2005-06-12
비밀의 매니아칼럼에서 오길희님글입니다. 작성자 : 오길희 증오와 파괴와 혼돈의 「문화대혁명」 ▣1. 「홍위병(紅衛兵)」의 등장 1966년 5월 25일 「북경대학」의 학생 대식당에 학생이나 교직원이 밀어닥쳐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었다. 동쪽 벽에 거대한「대자보」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학장인「육평(陸平)」과 「대학」이나 「북경시」의 당 간부를 지명하여 비판하는데 그 내용은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적기(赤旗)를 높게 내걸고 모든 요사스러운 변혁과 「후루시쵸프」같은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를 일소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자』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6월 1일밤, 「중앙인민방송국」은 이것을 「전국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라고 칭찬하였고, 다음날 당 기관지「인민일보」에도 대자보의 내용에「환호를 보낸다」라는 논평을 덧붙여 전재되었다. 막후에 『공산당 중앙(「모택동」을 지칭)』이 움직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육평」의 마음은 얼었다. 『우리는 「홍색정권」을 방위하는 위병이다』 「북경」의 「청화대학」「부속중학」에 내걸린 「대자보」의 서명은「홍위병」이었다. 당간부의 자제들은 「모택동」신격화가 본격화 될 때 교육받고 자라, 『「모택동사상」에 의한 혁명 계속』에 열광했다. 학내에는 「대자보」가 넘쳤고 「홍위병」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데모를 계속했다. 이 소란을 「유소기」국가 주석은 심각하게 여겨 막아내고,「등소평」당총서기와 함께, 「항주」에서 요양중인 「모택동」을 찾아가 사태의 수습에 나서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 제안을 거절하면서 「혼란스러우면 그 혼란에 맡겨두는 것도 좋지 않은가」라고 발언하면서 당분간 귀경할 생각은 없으니 두 명이 뜻대로 문제를 처리하도록하라고 대답했다. 「유소기」는 이때까지 이 소란의 진정한 표적이 자신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2. 누가 「지나」의 「후루시쵸프」인가? 10년전, 56년 2월에 「소련」의 공산당 제 1서기「후루시쵸프」는 「스타린」의 독재를 비판하는 비밀 보고를 했다. 신격화되고 무류성을 믿어 왔던 「스탈린」의 우상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를 본 「모택동」은 격노하면서도, 『「지나」에도 수정주의가 나타나 자신의 죽음뒤에 저 처럼 채찍을 맞지나 않을까?』라는 의심에 사로 잡혔다. 「대약진」정책이 파탄나고, 59년에는 국가 주석의 지위를 「유소기」에게 이양했다. 그리고 「유소기」의 수정주의적 정책은 착착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자신은 머지않아 「스탈린」과 같은 말로가 된다. 이 위기를 타 개 하기 위해서 생각해 냈던 것이 대중 동원에 의해 당 밖에서 수정주의자들을 타도 하려고 하는 방법이「문화대혁명」이었다. 그러나, 전술의 귀재「모택동」은 갑자기 권력 중심인 「유소기」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은 하지 않았다. 우선 「북경」의 학생 들이 「북경대학」이나 「북경시」의 당 간부를 「반혁명」이라고 규탄한다. 누가 누구를 공격하고 있는 것 인가를 알지 못하는 사이, 국가 전체는 혼란에 빠지고 이 혼란에 편승하여 「유소기」의 실각을 노리는 원대한 전법이었다. ▣3. 날뛰기 시작한 「손오공」들 『중앙 기관이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과오를 저지르면, 나는 지방이 조반(造反)하여 중앙으로 밀고 올라가야 한다고 호소한다. 각지는 많은 「손오공」을 보내어 천궁(天宮)을 시끄럽게 해야 한다.』 「모택동」의 이 말대로 「지나」 전국의 학교에서 「손오공」들이 나타나 날뛰기 시작했다. 상편에서 언급한 「윤치안」이 다니던 중학에서도 65년 6월 초순부터 수업이 전면적으로 정지되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매일 등교하였고 스피커에서는 「인민일보」의 논설을 낭독하는 소리가 쾅쾅 울렸고, 교실에서는 「인민일보」의 일면 기사를 학습했다. 「인민일보」는 학교의 「시험」은 『「학생을 적으로 취급」하는 「브르죠와 지식 분자」들의 교묘한 술책이기 때문에 분쇄해야 한다』 라고 「모택동」의 말을 인용하면서 학생을 부추기고 「조반유리(造反有理)」(반란에는 그 이유가 있다)라는 구호가 난무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홍위병」조직을 만들어 학교에서 숙박하면서 매일 집회나, 대자보 만들기에 몰두했다. 장발, 스커트, 좁은 바지는 「브르죠와의 퇴폐」라고 하여 규탄되었다. 「윤치안」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면서, 길게 땋아서 늘어뜨린 머리머리 카락을 잘라버리고, 일부러 단을 덧 댄 바지를 입고 마지 못해 학교에서 숙박했다. ▣4. 고민·절망·허탈 한번만이라도 「계급의 적」이란 평가를 받게 되면, 규탄 집회에서 용서없이 내 몰리게 된다. 「윤치안」의 철학 선생은 성적이 나쁜 학생에게 냉담한 편이었는데 그것에 앙심을 품은 학생이 「퇴폐적이다」고 비판했다. 이 여교사는 남편과의 만남이 버스안이였고, 우연히 만난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비판을 하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은 이 여교사에 대해서 「혁명 행동」즉 구타를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며 마루바닥에 쳐박고 「그만두라!」고 외치는 선생에게, 남학생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걷어차면서 「그만두라고?」 그러면서 매우 불량한 모습으로 『그만두고 싶거던 공손하게 머리를 고두(叩頭)하면서 「혁명에 나선 어린 장군님들 아무쪼록 목숨을 살려주세요」라고 말해라.』 「고두」라는 것은 무릎을 꿇고 마루에 머리를 찧으면서 하는 굴욕적인 모습이다. 「고두」를 하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치욕중의 치욕이다. 「윤치안」은 「마음에 둔 학생의 얼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하는 치욕스러울것이다」이라고 하면서도 그 자리에 잇을 수 밖에 없엇다. 그리고 학생들은 「윤치안」의 연약한 혁명성을 질타하면서 그 나약한 혁명정신을 교정하기 위해서 구타에 참가하라고, 급우들에 의해 앞으로 나서게되고. 선생은 몸을 일으켜 마루에 앉아, 멍한 시선을 던졌다. 「윤치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사이로 보이는 선생의 눈빛은 고민과 절망과 허탈이었다. 「윤치안」은 그 자리로부터 도망쳤다 ▣5. 왜 이런 꼴을 봐야 하는가? 이윽고 탄압은 시나 당의 간부들에게 미쳐 왔다. 절도, 강간, 마약밀매등으로 경찰에 잡혔던 전과자들이 조반(造反)에 참가하는 것이 허용되어 구(區)의 간부들의 매달기 시작했다. 선전 부장을 하고 있던 「윤치안」의 어머니는, 개인적인 원한은 사고 있지 않았지만, 간부라는 이유만으로 규탄받게 되었다. 어머니는 몇번이나 원추형의 종이 모자를 머리에 씌워졌고 목에 죄목을 적은 판을 달고 마을을 행진하게 했다. 2, 3보 걸을 때마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는 군중에게 고두를 하였고 그런 작은 소리로눈 안된다고 외치는 구경꾼이 있으면 어머니는 포장된 도로에 머리를 부딪쳐 더 큰소리가 나게 해야 했다. 어떤 규탄대회에서는, 깨진 유리 파편 위에 무릎을 꿇고 걷게하여 그 날 밤 늦게까지 할머니가 족집게와 바늘로 어머니의 무릎에서 유리파편을 빼냈다. 조모는 『내 딸이 무엇을 잘 못하여 이런 꼴을 봐야 하는가』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6. 무엇이 「문화대혁명」이냐? 「윤치안」의 아버지는 「사천성」당위원회의 선전부부부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다. 그 지위를 노리는 선전부의 부하중 한사람인 「요(姚) 여사」가 「홍위병」들을 이끌고, 자택을 습격했다.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지나」고전문학 책들을 가리키며 「독초」들은 모두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윤치안」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생활비를 절약하며 사모은 책은 불속에 던져져 불타고 있었다. 아버지는 격렬하게 통곡하면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있었고. 「윤치안」이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의 우는 모습이었다. 다음날부터 아버지에 대한 규탄 집회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두들겨 맞고 차이면서도 결코 굴복 하지 않았다. 『무엇이 「문화대혁명」이냐! 「문화」란 찾아 볼 수 없지 않는가! 이런 것은 「혁명」이 아니고 단순한 「만행」일 뿐이다』 감금된 채로, 이러한 규탄대회가 연일 계속되어 이윽고 「윤치안」의 아버지는 일시적으로 정신이 이상하게 되었다 이윽고 「윤치안」의 부모님은 따로 따로 「히말라야」동쪽 끝에 만들어진 「간부학교」라고 불리는 「노동 캠프」로 옮겨졌다. 「지나」전국에 수천 곳도 넘게 만들어진 「간부 학교」에는 당의 간부, 작가, 학자, 과학자, 교사, 의사, 배우 등, 지식인 계급이 잇달아 이송되었다. 「사천성」의 선전부 부부장의 지위는 아버지를 규탄한 「요여사」가 차지하였다. 「페어 뱅크」교수는 당 간부에서 배제된 사람은 약 60%정도이고 모진 매질과 갖은 학대로 사망한 사람은 4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피해를 입은사람들은 가족을 포함해 「지마」전체로 1억명에 이르렀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7. 진지하게 학습하고, 몸을 돌본다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2개월 후인 66년 10월 「북경」에서 개최된 「중앙공작회의」 석상에서 국가 주석「유소기」 당중앙 위원회총서기「등소평」이 「부르조아 반동 노선」의 두목이 되어 타도 대상이라고 선언되었다. 67년 1월 12일에는 「홍위병」들이 국가 주석의 공관까지 밀려들어가 「자기비판」을 강요했다. 다음날 「모택동」에게 불려 간 「유소기」는 『이번 노선의 잘못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니 간부들을 빨리 석방해 주었으면 하다. 자신은 국가주석에서 물러나, 고향으로낙향 은퇴하겠다』라고 말했다. 「모택동」은 거기에는 일언반구 대답하지 않고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열심히 학습하고, 몸을 추스리라」는 말을 하였다. 「모택동」의 웃는 얼굴이 숨기고 있는 것은 「유소기」 타도를 목표로 내걸고 계속하는 것은 「유소기」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67년 7월에는 수십만명의 「홍위병」들에게 둘러싸져 「비판대」에 끌려 나와 2시간에 걸쳐 양손을 곧바로 뒤로 펴고, 허리를 굽혀 머리를 내리는 자세로 있었다 그 모습을 「유소기」의 어린자식에게도 보이게 강요하였다. 9월에는 자택에 연금되었고 아픈 손으로 옷을 입는데 30분이나 걸렸고 다리의 상처가 악화 되어 30미터 떨어진 식당에 걸어 가는데 50분이나 걸렸다. 그곳에서는 만들어진 허술한 식사를 하였다 68년 10월에는 「간첩」 「반당 분자」라는 혐의로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이 선언되고 69년 10월 벌거벗은 채로 군용 모포에 둘둘 말려 콘크리트바닥인 창고 방에 옮겨졌다. 폐렴 때문에 고열과 구토가 계속되었고 1개월정도 지나 「유소기」는 사망한다. 「모택동」의 「타도 유소기」는 「문화대혁명」을 기도하고 나서 4년이 걸려 완료 했다. ▣8. 젊은이들에게 무기의 취급을 경험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67년의 여름에는 「지나」 전국이 내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초기의 「홍위병」들은 공산당 간부인 자제가 많았던 탓에 그 부모들이 규탄되기 시작하자, 파벌로 나누어 져, 내부 항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천성」은 무기 탄약 제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각파가 군수 공장이나 무기고로부터, 전차, 장갑차, 대포까지 빼앗아 무장했다. 「선빈(宣賓)」이라는 마을에서는, 대포나 수류탄, 박격포, 기관 소총을 사용한 내전이 일어나, 백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패주한 일파가 인근의 「여주(濾州)시」로 도주하자 5 천명이 추격을 하기 시작하여 3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모택동」은 「젊은이들에게 무기의 취급을 경험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전쟁을 경험 한지 오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9. 잔인하고 추악한 「지나」를 남겼다  69년 1월, 부담스럽기만 하게된 전국의 「홍위병」 1500만명은 일제히 농촌으로 「하방(下放)」되게 되었다. 「윤치안」은 형제와 함께 「사천성」의 두메 산골로 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교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노동 캠프」를 방문한다.  남동생인 「경명」이 71년말에 방문했을 때, 아버지의 정신 이상은 어느정도 좋아 졌지만 몸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둘이서 걷고 있을 때, 호흡 곤란으로 발작이 왔지만 「경명」에 말했다. 『아버지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상은 부정으로 마미되어 있다. 공산당에 들어간 것은,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서였다. 입당한후 쭉 전력을 다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인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가족모두를 파멸의 구덩이로 넣은 것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이고생을 해왔는가?. ···만약,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죽는다면, 더 이상 공산당을 믿지는 말거라.』 76년 9월, 「윤치안」은 「모택동」의 죽음을 알았다. 「터무니없는 행복감에, 나는 일순간 뿌옇게 되었다.」 1957년의 「대약진」으로부터 시작된 「공백의 20년」이 간신히 마지막을 고했던 것이다. 「윤치안」은 머리를 흔든다. 「모택동」은···질투나 원한이라고 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교묘하게 파악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방법을 잘도 알고 있었다. 「모택동」은 인민이 서로 미움하게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나라를 통치했다. ··· 또한 건축, 미술, 음악 등 자신이 이해 할 수 없는 분야에는, 떨끝 만큼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은 「지나」의 문화유산을 거의 파괴해 버렸다. 「모택동」은 잔인한 사회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과거의 문화유산까지 부정하고, 파괴하여, 추악하고 잔인한 「지나」를 남기고 죽었던 것이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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