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반일시위운동이란 1919년 3월 13일에 룡정에서 일어난 반일시위운동을 발단으로 하여 동북 조선족집거지역에서 조선의 《3.1》반일독립운동을 성원하여 일으킨 성세호대한 반일대중운동을 말한다.
조선족집거지역에서 오랫동안 준비되어오던 반일운동은 조선의 《3.1》반일민족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영향밑에 3월 13일 룡정에서의 여러 반일단체들의 성세호대한 반일대중집회를 계기로 하여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이날 점심때쯤 하여 룡정 천주교 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룡정과 린근 여러학교의 교원과 학생, 반일군중 3만여명은 군벌정부 군경들의 저애를 물리치고 사면팔방에서 회의장소에 모여들었다. 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은 조선인민의 반일민족투쟁을 격조높이 성원했으며 《독립선언포고문》을 랑독하고 조선과 중국 동북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의 죄행을 성토하였다. 회의후 시위행진이 시작되었다. 명동중학교 학생들을 위주로 하여 무어진 《충렬대(忠烈隊)》를 선두로 한 시위행진대오는 일본총령사관을 향해 진군하였다. 도중에 일본침략자와 지방군경들의 무력저애를 받은 분노한 군중들은 적수공권으로 적들과 박투하였다. 당장에서 10명이 희생되고(후에 또 7명이 사망) 3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3월 17일, 각 계층 인사들과 3,000여명의 군중들은 다시 룡정에 모여 희생된 렬사들을 안장하고 일본제국주의와 군벌정부의 피비린 학살만행에 항의하였다.
룡정 《3.13》반일투쟁의 불길은 인차 여러 조선족거주지역에 널리 파급되었다. 연길현에서는 3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의 사이에 여러곳에서 수백명 혹은 수천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집회를 가지고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네개 현에서만 해도 이번 투쟁에 참가한 조선족민중이 무려 86,600여명이나 되었다.
남만 각지의 조선족인민들도 련이어 조직되어 일떠나 반일운동을 벌렸다. 3월 12일부터 4월 22일까지의 사이에 류하, 통화, 장백, 집안, 환인, 관전 등 현들의 조선족군중들은 련이어 반일집회를 가지고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3월 13일 룡정을 선두로 하여 조선족들이 거주하는 지역들에서 일어난 반일대중시위운동은 그 규모나 지속된 시일 및 참가한 범위와 수효 면에서 모두 전례가 없었다. 이번 투쟁은 일제침략자들의 침략기염을 꺾어놓았고 조선인민들의 반일민족애국투쟁을 힘있게 성원하였으며 조선족인민들의 반제운동의 발전을 힘있게 추동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로 하여 한국의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이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한 《살기 위한》움직임만이 아니라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망명 성격을 띤 이민자도 적지않았다.
당시 중국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인구집계를 보면 1907년에 7만명이였다면 한일강제합병을 선포한 1910년에는 10만명을 초과하였고 1916년에는 20만명을 넘었으며 1920년에는 45만9천여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이때부터 중국으로의 이민은 단순히 살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일제통치를 피해오거나 반일을 위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0년대에 중국으로 이주한 반일지사들과 초기 이민들은 즉각적인 항일투쟁보다 우선 학교를 설립하고 후세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1906년 리상철, 리동녕 등이 먼저 룡정에다 서전서숙을 꾸렸으며 그뒤에는 명동학교, 창동학교 등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으며 1919년에는 군사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신흥무관학교까지 세워졌다.
1910년대 이렇게 반일을 목적으로 한 학교가 연변에만 해도 72개소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191개소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조선족 거주지역에서 반일운동은 새로운 고조를 이루었다.
《3.13》운동을 계기로 반일무장대오가 중국조선인집거구에서 조직되였다. 그들은 《3.13》피의 교훈에서 오직 무장반항만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생존권리를 찾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19년4월부터 중국 동북각지의 조선인반일단체들은 모두 무기를 구입하고 무관학교를 세우며 무장대오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건립된 조선인반일무장대오중 비교적 큰것으로는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무장대회(대원400명, 보총 450자루), 서일(徐一),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대원 600명, 보총 500자루, 권총 150자루),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명록, 박영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삼원포에서 조직된 독립군비단 등이다.
이러한 반일무장대오들은 변경지구 및 조선에 건너가 부단히 일본군경들을 습격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21년 한해동안 반일부대들이 일본군과의 교전차수는 602차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들썽하게 한적도 한두번이 아닌바 그중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