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폭정(暴政)를 말하면 중국인들은 흔히 진시황(秦始皇)의 가혹한 정치 및 분서갱유(焚書坑儒)(주:책을 불사르고 유생들을 생매장 한다는 뜻)를 련상하게 된다.【한서.식화지】의 기재에 따르면 진시황은 “온천하의 재물을 거두어 정치에 바치게 했다고 하는데 그의 포학한 정치는 네가지 방면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1) 무절제한 징세(徵稅)와 과중한 세금. (2) 큰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백성들의 로동력을 람용. (3) 가혹한 형벌과 련좌제. (4) 사상제한과 분서갱유(焚書坑儒).
진(秦) 왕조가 중국을 통치할 때, 약 천만 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그 중 2백만 명이 로역(勞役)에 징발당했다. 이는 청장년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진시황은 나아가 사상 령역에서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여 사상자유를 속박했으며 조정과 의견이 다른 유생(儒生)을 천여 명이나 살해했다.
‘승냥이 같은 진시황’과 비교할 때, 공산당의 포학함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사람들이 모두 알다시피 공산당의 철학은 투쟁철학이다. 공산당의 통치 역시 일련의 대내외적인 ‘계급투쟁’, ‘로선투쟁’, ‘사상투쟁’ 위에 건립되었다.
모택동 자신도 조금도 거리낌없이 솔직히 말한 적이 있다. “진시황이 다 무엇인가? 그는 460여 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6천여 명의 유생을 생매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고 독재정치이며 진시황과 같다고 욕하는데 우리는 모두 승인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당신들이 말한 것이 아직 충분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더 보충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국이 공산당 통치 하에서 어렵게 걸어온 55년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후, 어떻게 정부 기구를 리용하여 계급투쟁 리론으로 계급 학살을 실시하고, 폭력혁명 학설로 공포통치를 실시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 공산당은 ‘살인’과 ‘마음 말살(誅心)’을 같이 사용하여 공산당 이외의 일체 신앙을 탄압했으며, 가면을 쓰고 정치 무대에 등장하여 중국에서 공산당을 ‘신을 만드는[造神]’ 운동을 위한 큰 서막을 열었다. 또한 공산당의 계급투쟁리론과 폭력혁명학설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한 계급 한 계급씩 서로 다른 범위와 단체의 사람들을 제거한 동시에 투쟁과 기만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중국 전체 인민들을 공산당 폭력통치에 순종하는 백성들로 만들었다.
1. 토지개혁을 리용하여 지주계급 제거
건국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공산당은 중국 전역에서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밭갈이 하는자에게 밭을 준다’(耕者有田)’의 구호를 내걸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지주들에 대해 투쟁하도록 했으며, 인간성 중에서 리기적인 것을 방임하여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도록 고무격려 하였으며 도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동시에 토지개혁 전체 로선중에서 ‘지주계급을 제거’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제출하였다. 또 농촌에서 광범위하게 계급을 구별하고 성분을 확정하며 전국적으로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지주[地], 부농[富], 반혁명[反], 나쁜 사람[壞]’의 모자를 씌워 그들로 하여금 중국 사회에서 멸시와 공격을 받으며 공민(公民)의 권리가 없는 ‘천한 사람(賤民)’이 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토지개혁이 변경 지구와 소수민족에까지 깊이 침투됨에 따라 공산당 조직도 신속히 확대되어, 향(鄕)에는 당 위원회가 있고 촌(村)에는 당 지부가 있는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당 지부(支部)는 당의 지령을 상명하달(上命下達)하는 공산당 제일선 조직으로, 종종 계급투쟁 제1선에 뛰어들어 농민을 선동하여 지주와 투쟁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근 10만 명에 달하는 지주들이 생명을 잃었다. 더욱이 어떤 지역에서는 지주뿐만 아니라 그 일가족을 몰살시켰는데 심지어 부녀자와 아이들마저도 불행을 면치 못했다.
이 시기에 공산당은 전국 농촌에서 처음으로 ‘모주석은 인민의 대구성 [大救星]’이며 ‘오로지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선전을 시작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혜택을 입었으며 또 적지 않은 빈농(貧農)들은 공산당에 대해 감지덕지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인민을 위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로 말하자면, ‘밭갈이 하는 자에게 밭을 준다(耕者有田)’ 의 좋은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토지를 분배한지 2년도 채 안 되어 공산당은 호조조(互助組), 초급사(初級社), 고급사(高級社), 인민공사(人民公社) 등 일련의 운동을 농민들에게 강요하였다. ‘전족(纏足)’을 비판하면서 여론조성을 하더니, 해마다 박차를 가하여 농민들에게 사회주의에 ‘뛰어들어’ 오도록 요구하였다. 전국적으로 량식(粮食), 면화(棉花), 기름을 통일적으로 구입, 통일적으로 판매하여 전국의 주요 농업생산품을 시장 밖으로 배척하였다. 더욱이 호적제도를 강화하여 농민들이 도시에 들어가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농촌에 호적이 있는 사람은 국가 량식점에 가서도 량식을 사지 못하며 자녀들도 도시에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결국 농민의 자녀는 다시 농민밖에는 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3억6천만 농민들는 2등 공민으로 전락되었다.
1978년 개혁(改革)을 시작한 년대에 와서야 전국이 초소요(小康)상태로 향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9억 농민은 가정 도급제가 인민공사를 대체한 최초 5년간 수입이 증가하고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개선된 것 외에, 잇달은 농산품 및 공산품 가격하락과 농촌간부들의 착취 속에서 또 다시 빈곤속에 빠졌다.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소득차이가 급격히 커지고 빈부차이가 확대되어, 농촌에서는 다시 새로운 지주나 부농이 나타났다. 신화사(新華社)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97년 이래, “주요 쌀 생산지역과 다수의 농민가정 수입이 지속적으로 정지상태에 있으며 심지어 수입이 떨어지고 줄어들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농민의 농업소득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줄어들었다. 도시와 농촌 주민의 소득 차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80년대 중반 1.8:1에서 지금은 3.1:1 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2. 공상업 개조를 리용하여-자산계급 제거
또 하나의 소멸해야 할 계급은 도시와 농촌의 민족 자산계급이었다. 공상업 개조 중, 중국 공산당은 “자산계급과 공인계급은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 즉 하나는 착취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비착취 및 반착취 계급이다. 자산계급의 착취는 타고난 것이라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제거할 수 밖에 없으며 개조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자본가 및 상인에 대한 개조는 더욱 엄중하여 ‘살인’과 ‘마음말살(誅心)’을 같이 사용하였다. 원칙은 여전히 순종하면 살려주되 반항하면 멸망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만약 재산(資産)을 바치고 아울러 공산당을 옹호한다고 표시하면 곧 인민내부의 모순이 된다. 당신이 만약 반감을 갖거나 불평이 있다면 즉각 반혁명으로 취급하여 독재의 대상으로 된다. 피비린내 나는 탄압 속에서 자본가, 상인들은 자신들의 재산(資産)을 몽땅 바쳐야 했다.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굴욕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자살하였다. 당시 상해시 시장 진의(陳毅)는 매일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오늘은 또 락하산병이 몇 명이나 있었는가?” 말뜻인즉, 그날 또 얼마나 많은 자본가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는가를 물은 것이다. 이렇게 공산당은 잠깐 사이에 사유재산제도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토지 개혁과 공상업 개조를 하는 동시에 공산당은 반혁명진압(鎭反), 사상개조, 고강(高崗)과 요수석(饒漱石) 반동집단 타도, 호풍(胡風) 반혁명집단 조사, 3반(三反), 5반(五反), 숙반(肅反) 등 일련의 전국적인 정풍(整風)운동을 개시하였다.
매 차례 운동에서 공산당은 모두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기구 및 당 위원회, 당 총지부, 당 지부와 함께 무릇 공산당원이 세 사람만 되면 하나의 전투 보루를 만들어 농촌과 도시가두에 깊숙이 들어갔다. 이리하여 공산당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관계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항일전쟁 시대부터 있어 온 당 지부 건설을 통한 이런 방식의 그물식 통제구조는 후에 일련의 정치운동 및 오늘날 인민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줄곧 관건적인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3. 회도문(會道門) 단속 및 종교탄압
공산당 정권이 건립된 초기에 발생한 다른 하나의 사건은 종교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과 회도문 단속이다. 1950년, 공산당은 각 지방 정부에 지시를 내려 전면적으로 회(會)·도(道)·문(門), 즉 지방의 종교 및 방회(幇會) 조직을 단속하라고 했다. 문서에서는 봉건 회도문 조직은 국민당 특무 및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들이 조종하는 도구라고 지적했다. 전국 향진(鄕鎭)까지 파급된 이 운동 중에서 정부는 공산당이 믿을만 하다고 인정하는 계급을 동원하여 회도문 구성원들을 적발하고 공격하였다. 각급 정부는 모든 ‘미신’ 조직, 예컨데 기독교, 천주교, 도교[특히 일관도(一貫道)], 불교 등 조직을 해체시키는데 참여하였다. 또 이런 교회, 불당(佛堂), 방파의 구성원들에게는 정부에 가서 등록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새 출발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만약 등록하지 않고 나중에 조사해서 적발되면 엄벌에 처한다고 하였다. 1951년 공산당 정부는 회도문 활동을 계속 하는 자는 사형 혹은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명문(明文)으로 반포했다.
이번 운동에서는 신(神)을 믿고 선(善)을 추구하며, 법을 준수하고 규률을 지키는 광대한 일반 백성들을 타격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탄압받은 기독교 신도만 백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당시 총 300만의 신도 및 회도문 성원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광대한 도시와 향촌(鄕村)에는 거의 집집마다 상세한 조사를 받았으며 심지어 농민들이 모시는 부엌신인 조왕신 마저도 파괴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동시에 오로지 공산당 사상체계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사상체계이며, 오로지 공산주의 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더욱 진일보로 확립하였다.
이때로부터 이른바 ‘애국(愛國)’신도가 있게 되었다. ‘애국’신도가 되면 능히 국가 헌법의 보호를 받는다. 실제상 백성들이 무슨 교를 믿든지 막론하고 표준은 다만 하나뿐이다. 바로 당의 지휘에 복종하고, 공산당이 일체 교회보다 높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당신이 기독교를 믿는다면 공산당은 바로 하느님의 하느님이다. 당신이 불교를 믿으면 공산당은 불조(佛祖)의 불조(佛祖)이다. 이슬람교를 말한다면 공산당은 바로 알라의 알라이다. 라마교의 생불(生佛)을 말하면, 누가 생불이 되는가 하는 것도 공산당이 허락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공산당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하면 당신은 그대로 말해야 하고,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키면 당신은 그것을 해야 한다. 종교 신자들에게는 당신들 각자의 신앙을 높이 치켜들되 당의 뜻에 좇아서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공격 대상이 된다.
2만여 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중국 22개 성(省) 207개 도시의 56만 명에 달하는 가정교회 기독교도들을 찾아 다니면서 한 방문 조사에 따르면, 가정교회 신자들 중 13만 명이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이 실증되었다. 1957년 전까지만 해도 1만천2백50여 명이 넘는 신도들이 살해되었으며 대량의 신도들이 임의로 체포되고 강제로 벌금을 당했다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 공산당은 중국에서 지주계급, 자산계급을 소멸시키고, 도시와 향촌의 신령(神靈)을 공경하고 법을 준수하는 수많은 인민들을 탄압하여 공산당 일교(一敎)가 천하를 통치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4. 반우파운동-전국적인 세뇌
1956년, 한패의 웽그리아 지식인들이 페토피(Petofi) 구락부를 조직했으나 쏘련이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탄압한 것을 웽그리아 사건이라고 한다. 모택동은 이것을 교훈으로 삼았다. 1957년 중국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을 사용하여 중국의 지식인들과 군중들에게 “공산당을 정풍(整風)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모택동의 의도는 바로 그들 속에서 ‘반당분자’를 속여서 유인해 내려는 것이었다. 1957년 초, 모택동은 각 성(省)의 당위원회 서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과 정풍을 빌어 “뱀을 유인하여 굴 속에서 나오게 하려는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당시에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격려하는 몇 마디 말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백화제방 백가쟁명에서 발언한 것을 리용하여) 약점을 잡지 않고, 공격하지 않으며, 루명을 씌우지 않고, 마지막에 누가 옳고 그른지 결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우파 투쟁에서 55만 명을 ‘우파분자’로 확정지었으며 27만 명이 공직을 잃었다. 23만 명이 ‘중도 우파분자’와 ‘반당(反黨), 반사회주의자’로 정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이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를 4가지로 정리해 냈다
1. 뱀을 유인하여 굴속에서 나오게 하기. 2. 죄명을 꾸며 갑자기 습격하고는 한마디로 죄를 결정하기. 3. 병을 고쳐 사람을 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4. 자아비판을 강요한 후에 이것을 근거로 끝없이 확대하여 비판하기.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우파분자와 반당분자들을 근 30년 간이나, 춥고 험한 변경지대로 류배시킨 이른바 ‘반동언론’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당시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고, 집중 비판대상이 되었던 우파분자의 ‘3대(大) 반동리론’은 라륭기(羅隆基), 장백균(章伯鈞), 축안평(儲安平)의 몇차례 발언에서 뽑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의 의견과 건의를, 간단히 말하자면
1. 공산당과 민주당파가 공동으로 하나의 위원회를 건립하여 3반(三反), 5반(五反), 숙반 사업 중의 잘못을 검사하자.(라륭기의 말)
2. 정치협상회의와 인민대표대회 대표를 국무원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시키라는 건의 (장백균)
3. 당외인사도 견해, 자존심과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니 이들의 작용을 발휘시키자.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단위를 막론하고, 심지어 매 과(科)나 소조마다 당원을 배치하여 책임자로 삼으니, 큰 일이고 작은 일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당원의 눈치를 본다.(축안평)
이 몇 사람은 모두 공산당을 따르는데 동의한다고 분명히 표시했으며, 의견을 제출한 것도 로신(魯迅)이 묘사한 것처럼 “어르신! 당신의 두루마기가 더럽습니다. 벗어서 씻으십시오.” 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우파’로 구분된 사람 중에, 공산당을 전복하자고 제출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비평과 건의에 불과했다. 바로 이런 비평과 건의때문에 수십만 명이 인신의 자유를 잃었으며 백만 가족들에게 고난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잇따라 온 것이 또 ‘당에 마음을 바쳐’ 백기(白旗) 뽑아내기, ‘신(新) 삼반(三反)’운동으로 우파분자들을 힘든 로동현장이나 농촌에 내려보내고 지난번 반우파 투쟁에서 빠진 자들을 찾아내어 새로 확정하기 등이다. 누가 만약 직장 상급, 특히 당위 서기에 대해 의견이 있으면 그는 곧 당을 반대한 것이 된다. 그 결과는 가벼운 경우 끝임없이 비판받고, 심한 경우는 로동교육을 받거나 혹은 전 가족을 농촌으로 추방했다. 이들은 자녀들이 대학을 가거나 군대에 갈 기회를 박탈당하며, 도시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하다. 이때부터 로동보장도 잃고 공비의료 혜택도 없어진다. 그들은 농민의 행렬에 들어가 2등 공민 중 천민이 되어야 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후, 일부 학자들은 담장 위의 풀처럼 바람에 따라 휩쓸리는 두가지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붉은 태양’을 바싹 따르며 남의 장단에 춤추는 공산당의 ‘황제용 지식인’이 되어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다른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청고(淸高)함을 유지하면서 정책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원래 천하의 흥망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던 중국의 지식인들도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5. 대약진(大躍進)-지록위마(주: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다는 뜻)(指鹿爲馬)로 충성심 시험
반(反)우파 투쟁 이후, 중국은 사실을 두려워하는 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거짓말을 듣고 거짓말을 하며 거짓 일을 하고 류언비어와 허위 행위를 통해 사실을 도피하고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이 세태가 되었다. 대약진은 곧바로 전 중국이 집단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전국 인민들은 공산당이란 사악한 령체(靈)의 인도 하에, 믿을 수 없고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일들을 조작해냈다. 거짓말을 하는 자와 기만을 당하는 자, 모두 스스로를 속였다.
거짓과 어리석음이 판치는 한 바탕 란리(鬪爭劇) 속에서 공산당은 자신의 포악하고 사악한 기를 중국 인민들의 정신속에 강제로 심어넣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곧 옥황상제요, 나는 곧 룡왕이다. 삼산오악(三山五岳)에 명령하노니 내가 왔으니 길을 열라고 하거라.” 라는 약진 가요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무(畝)당 만 근(斤)을 생산하고, 강철 생산량을 두배로 증가시키며, 10년 만에 영국을 초과하고 2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라는 황당한 계획을 실행하느라 기세가 드높았다. 이런 상황은 흉년이 전국을 휘몰아쳐 곳곳에 굶어 죽은 사람의 시체가 널리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없을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1959년 려산(盧山)회의에서,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 중 그 누가 팽덕회(彭德懷)의 의견이 정확하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 누가 모택동의 대약진이 황당하고 독단적으로 결정된 것임을 몰라겠는가? 그러나 모택동의 로선을 옹호하는 것은 ‘충신(忠)’과 ‘간신(奸)’,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이었다. 애초에 간신 조고(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것은 결코 실제로 어느 것이 사슴이고 어느 것이 말인지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좌우 여론을 떠 보고 당을 만들어 사리사욕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통해 천하 사람을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만들고 어떤한 반대의견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당시 팽덕회(彭德懷)본인도 부득불 자신의 마음을 어기고 팽덕회를 타도한다는 결의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등소평이 문화대혁명 후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원래 결정을 뒤엎지 않겠다.”고 보증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인류 사회는 늘 이미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를 넓히지만, 공산당은 사람들에게 전체 사회의 경험과 교훈에 대해 거의 알려 주지 않는다. 게다가 정부 매체의 소식 봉쇄로 인해 사람들은 시비를 판단할 능력이 갈수록 낮아졌다. 다음 세대는 이전 운동 중에서 지식인들의 리념, 리상(理想)과 경험에 대해 전혀 모른다. 오직 일부 단편자료만으로 력사를 이해하고 새로운 일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스스로는 정확하며 오류가 없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착각이다. 공산당의 인민을 우매하게 만드는 정책은 곧 이런 방식에 의거하여 크게 추진되어 나갔다.
6. 문화대혁명- 사악한 령체(靈)의 부체가 세상을 뒤엎어놓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 사악한 령체(靈)의 부체가 전 중국을 뒤흔든 사건이다. 1966년 중국 대지에는 또 한 차례 폭정의 세찬 조류가 일어났다. 적색 공포의 광풍은 마치 미쳐 날뛰는 요물 같았으며 고삐 풀린 들말과 같았다. 온 세상이 크게 놀라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작가 진목(秦牧)는 일찍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이것이야 말로 전례 없었던 한 차례 큰 겁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련루되어 고생을 겪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정이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불량배로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서적이 불태워졌고, 얼마나 많은 명승고적이 파괴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조상들의 무덤이 파헤쳐졌는가? 또 얼마나 많은 죄악이 혁명이란 거짓 허울을 쓰고 진행되었는가?”
전문가들의 보수적인 추측에 따른다고 해도 문화대혁명 기간에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773만 명에 달한다.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의 폭력과 학살에 대하여 종종 일종의 착각을 하는데, 이런 것의 대부분이 모두 반란 운동으로 야기된 무정부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살인자 역시 모두 ‘홍위병’이고 ‘혁명파’들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출판된 수천 권의 현지(縣志)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문화대혁명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홍위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중앙의 각급 정부가 마비되었던 1966년 말도 아니며, 혁명파들의 무력투쟁이 가장 성행했던 1967년도 아니다. 오히려 ‘각급 혁명위원회’가 설립되고 모택동의 국가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가 회복되었던 1968년이었다. 전국의 유명한 대학살 안건 중 폭력을 함부로 실시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살해를 진행한 흉수들은 대부분 군대의 장병, 무장 민병(民兵)과 각급 당원 및 공산당 핵심 간부들이었다.
아래 몇 가지 예로부터 우리는 폭행이 홍위병 혁명파의 일시적인 과격 행위가 아니라 공산당과 지방 정권이 사전에 결정한 정책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도자와 각급 권력기구가 폭정에 직접 지휘하고 참여한 사실은 도리어 은폐되어 왔다.
1966년 8월 홍위병은 ‘송환’이라는 미명하에 과거 여러 차례 운동 중에서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 우파 등으로 처리되었던 북경 시민을 강제로 북경에서 쫓아내 농촌으로 압송했다. 당국의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33,695호의 북경 시민들이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고, 85,196명이 도시에서 쫓겨나 원래 호적으로 송환되었다. 이 바람은 매우 빨리 전국 각 대도시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40만 명에 달하는 도시 주민들이 송환되어 농촌으로 갔다. 심지어 지주 출신의 공산당 고급 간부들의 부모마저 빠져나가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이런 송환 행동은 중국 공산당이 문화대혁명 이전에 이미 배치한 것이다. 팽진(彭眞)이 북경시 시장을 맡았을 때, 북경 시민들의 성분을 ‘유리나 수정’처럼 순정(純淨)하게 하려면, 즉시 성분이 나쁜 시민들을 모두 북경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66년 9월 모택동은 ‘수도를 보위(保衛)해야 한다’는 지시를 발표하고 엽검영(葉劍英), 양성무(楊成武)와 사복치(謝富治)를 두목으로 하는 공작조를 설립했다. 이 공작조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공안국(公安局)을 통해 이른바 ‘성분이 좋지 않은’ 시민들을 대규모 송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엇 때문에 홍위병들이 2%의 북경 시민들에 대해 재산을 몰수하고 송환시킨 것이 정부의 제지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공안국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는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공안국 국장 사복치는 일찍이 공안 간부 경찰들에게 홍위병을 제지하지 말고 홍위병을 위한 ‘참모’가 되어야 하며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홍위병들은 당국에 의해 리용당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1966년 말에 이르면 홍위병들 또한 공산당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련동(潞)분자’ 로 몰려 감옥에 들어갔다. 송환 활동을 주재한 홍위병 조직도 공산당 지도자의 ‘직접적인 관심’ 하에서 성립되었고 그들의 훈령 역시 당시 국무원 비서장이 수정한 후에 발표했던 것이다.
수도인 북경에서 지주, 부농 성분의 사람들을 농촌으로 송환한 데 이어, 농촌에서도 지주, 부농 성분의 사람들에 대한 박해 운동을 일으켰다. 1968년 8월 26일, 북경시에 소속되어 있는 대흥(大興)현 공안국 회의에서 공안부장 사복치의 연설이 전달되었다. 그 요점 중의 하나가 바로 공안 간부 경찰들은 홍위병의 참모가 되어 검은 5부류(黑五類,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 우파)의 정보를 제공하여 홍위병들이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즉, 다싱현 학살운동은 현(縣) 공안국이 직접 지령한 것이다. 살인 행동을 조직한 것은 공안국 주임과 당서기였다. 살인을 함에 있어서 어린이들마저 놓아주지 않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민병(民兵)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이 학살 중에서 ‘표현이 좋아’ 입당까지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문화대혁명 중 돌격 입당한 숫자가 광서(廣西)성에서만 9천여 명이 있었는데 살인 후에 입당한 경우였다. 2만여 명은 입당한 후에 살인했으며, 또 살인과 연루된 사람이 19,000명에 달했다. 결국 단지 광서성 한 곳의 통계만으로도 5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살인 사건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대혁명 중, ‘사람을 구타’하는 것도 계급 분석을 해야한다.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영광이며,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오해이다.” 모택동의 이 말은 당시 제멋대로 날치는 반란운동 중에 널리 퍼졌다. 계급의 적들에 대한 폭력은 모두들 ‘당연하다’ 라고 한 이상, 폭력 뿐만 아니라 살육도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호남성(湖南省) 도현(道縣) 인민 무장부 기층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 사람을 도살했다. 66일에 걸쳐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호에서 총 4519명이 련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점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를 점했다. 살해 당한 사람 중, 년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영아였다. 이는 다만 문화대혁명 폭행 중에 발생한 한 지역의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내몽골(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류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서 (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이로부터 볼 수 있듯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 주요한 폭력 학살사건과 큰 사건은 모두 국가기구의 행위였으며 공산당 지도자들의 용인(容認)하에 폭력을 리용하여 백성을 박해하고 학살한 것이다. 이런 학살을 직접 지휘하고 집행한 흉수들은 대개 군대, 경찰, 무장 민병과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만약 토지개혁을 땅을 위하여 농민에 의거하여 지주를 타도한 것이고, 공상업 개조는 재산을 위하여 로동자에 의거하여 자본가를 타도한 것이며, 반우파 투쟁은 지식인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문화대혁명과 같은 종류의 무차별적인 투쟁은 결코 그 어느 계급에도 의거할 수 없었다. 설령 당신이 공산당이 의지하는 로동자나 농민이라 할지라도 관점이 일치하지 않기만 하면 곧바로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바로 공산당이 단독으로 천하를 통치하는 대세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국가를 통치할 뿐만 아니라 매 개인의 사상도 통치하였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과 모택동을 ‘신(神)으로 만드는’ 운동이 최절정에 도달한 것이다. 반드시 모택동의 리론으로 모든 것을 독재하며 한 사람의 리상(理想)을 억만인들의 머릿속에 스며들게 해야만 했다. 특이한 것은 문화대혁명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고 도리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가서 해야 하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없으며 생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인민들은 마치 종교 숭배처럼 “아침에 청시하고 저녁에 회보하는”형식을 행해야 했다. 매일 여러 차례 모택동 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으며 아침, 저녁 두 차례 정치 기도를 했다. 글자를 아는 사람들은 자아비평과 사상보고를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때 사용하는 말도 반드시 모택동 어록에 근거한 것만 가능했다. 가령 “리기적인 일념에 맞서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거나 “리해해도 집행하고 리해하지 못해도 역시 집행해야 하며 집행 중 깊이 리해해야 한다.” 등이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오직 하나의 ‘신(神)’만을 숭배해야 했고 오직 하나의 ‘경(經)’만 읽어야 했으니 바로 모택동 주석의 어록이었다. 어록을 암송하지 못하거나 모택동에 대한 축원의 말을 하지 않으면 식당에서 밥을 살 수도 없었다. 물건을 사거나 차를 타도, 전화를 걸어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어록 한구절을 외워야 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할 때, 열광적으로 흥분하거나 혹은 감각이 무디어졌는데, 이미 완전히 공산당이란 사악한 령체 (靈)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거짓말을 조작하고 거짓말을 받아들이며 거짓말에 의거하는 것은 이미 중국인민의 생활 방식이 되어버렸다.
7. 개혁(改革) 개방(開放) - 계속되는 폭정
문화대혁명은 선혈이 랑자하고 원혼이 도처에 떠돌며 량심을 저버리고 시비(是非)가 뒤집혀진 시대였다. 문화대혁명 이후, 성루의 깃발만 바뀌듯이 공산당과 공산당 지도 하의 정권은 이십여 년 사이에 6대(代)의 지도자를 바꿨다. 사유재산제도가 다시 부활되었으며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커졌고, 사막이 급증하고 강물이 말라들었으며 마약 판매와 매음(賣淫)이 급증하였다. 일찍이 중국 공산당이 소멸시키려고 했었던 ‘죄악’들이 공산당에 의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잔혹성, 악독성, 기괴한 행동, 나라를 망하게 하는 수법은 줄기는커녕 더 늘어만 갔다. 6.4때, 땅크가 천안문(天安門) 광장에 쳐들어와 학생들을 깔아 뭉갰고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잔혹한 박해는 이루다 말할 수 없다. 2004년 10월 섬서성(陝西省) 유림시(楡林市) 시정부에서는 농민들의 토지를 징발하기 위해 1600명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농민들에게 총을 쏘아 상처를 입히고 5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수있다시피 지금 중국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의 투쟁철학과 폭력 숭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이전보다 더 기만적이라는 점이다,
법률: 공산당 정권이 끊임없이 인위적인 투쟁을 조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반혁명분자, 반사회주의 분자, 나쁜 분자와 사교분자라는 루명을 씌웠기에 공산당 독재집단과 각 민족 인민 단체 사이에는 첨예한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다. 공산당은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를 안정시킨다.” 는 명분으로 ‘법률’과 ‘조례 및 명령’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인민들의 불만 행위를 반혁명 행위에 귀납시켜 탄압하였다. 1999년 7월, 강택민은 정치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려 3개월 내에 파룬궁(法輪功)을 소멸시키려 하였다. 이리하여 한때 요언들이 하늘을 뒤덮듯이 전국을 휩쓸었다.
강택민이 개인 명의로 프랑스 한 매체에 파룬궁은 ‘사교[邪敎]’라고 선포하자 정부 매체에서는 서둘러 문장을 발표하여 전국 각계에 압력을 가했고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위협하여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른바『결정』을 내리게 하여 사교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뒤이어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서 인민대표대회의 『결정』에 대한 『해석』을 발표하였다. 1999년 7월 22일,신화사에서는 중공 중앙 조직부 책임자, 중공 중앙 선전부 책임자의 연설을 발표하여 공개적으로 강택민의 파룬궁 박해를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광범위한 인민 대중들을 사람과 신이 모두 놀라고 분노하는 이번 박해에 말려들게 하였다. 이미 ‘(당) 중앙’에서 그 성질을 규정하였기에 그들은 옹호하고 집행만 할 뿐 전혀 다른 의견을 제기하지 못했다.
5년이래 국가 기관에서는 전체 국가 예산의 4분의 1을 투입하여 파룬궁을 탄압하였다. 중국 인민들은 사람마다 모두 관을 넘어야 했고 무릇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승인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직에서 해직시키고 감금시켜 로동개조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나라를 배반하고 정부를 반대한 것도 아니며 오직 진선인(眞善忍)을 믿는다는 리유만으로, 수천수만 명이 감금되었다. 비록 공산당이 소식을 겹겹이 봉쇄하였지만 친속들을 통해 조사 확인한데 의하면 현재까지 살해된 것으로 확인된 사람이 천백여 명에 달하고 아직까지 실증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뉴스: 홍콩 『문회보(文滙報)』는 2004년 10월 15일 중국의 제20번째 과학실험위성이 지구로 돌아올 때 사천성(四川省) 대영현(大英縣) 봉래진(蓬萊鎭)의 곽적옥(霍積玉)씨의 집에 떨어져 집이 훼손되였다고 보도하였다. 보도에서는 대영현 현정부 주임 애유경(艾裕慶)의 말을 인용하여 이 ‘검은 덩어리’는 확실히 되돌아 온 과학실험 위성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사실 애유경은 또한 위성 회수 현장의 부책임자였다. 그러나 신화사에서 운영하는 신화망(新华网)은 위성이 돌아온 시간만을 발표하면서 이것은 중국에서 회수한 제20번째 과학기술 실험위성이라는 것만 강조했을 뿐, 위성이 민가(民家)를 훼손한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처럼, 좋은 소식만 알리되 나쁜 소식은 알리지 않는 수법은 언론 매체들이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채용한 일관적인 작법(作法)이다. 여러 차례 운동 중에서 신문과 텔레비전은 옆에서 부추기고 류언비어를 퍼뜨리면서 공산당의 방침과 정책이 실시될 수 있도록 도왔다.
공산당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전국 매체에서는 즉시 집행한다. 당에서 우파를 반대하면 전국에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우파의 죄악을 보도했고, 당에서 인민공사를 세우려고 하면 전국에서 한결같이 인민공사의 우월성을 찬미했다. 파룬궁 탄압 운동이 시작된 첫 달에 언론매체에서는 매일 황금시간 대에 반복적으로 전국 인민들을 세뇌(洗腦)시켰다. 이때부터 강택민은 모든 대중 매체에 인민들로 하여금 파룬궁을 증오하게 하는 이른바 ‘분신자살사건’, ‘살인사건’ 등의 거짓 뉴스와 거짓 사건들을 날조하게 하였다. 그 중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을 조작한 거짓 안건은 중국 정부가 앞장서서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를 했다는 리유로 국제교육발전기구의 질책을 받았다. 지난 5년 동안 중국 국내의 어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도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을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이제 뉴스에서 거짓을 보도해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신화사의 한 오랜 기자조차도 “신화사의 보도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민간에서는 심지어 중국의 언론기구는 공산당의 앞잡이라고 표현하였다.“그것은 한 마리 개처럼 공산당의 대문을 지키고 있네. 누구를 물라고 하면 누구를 물고, 몇 번 물라고 하면 몇 번 문다네.” 이것은 한 민요에 나오는 내용이다.
교육:교육은 인민들을 통치하는 또 다른 족쇄이다. 교육은 본래 지식인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식(知識)은 ‘지(知)’와 ‘식(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知)’란, 정보, 자료, 전통문화와 시사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고 ‘식(識)’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분석, 연구, 비판, 재창조하는 것으로 즉 정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지(知)만 있고 식(識)이 없으면 책벌레이고 진정으로 사회의 량심적인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왜 력대로 ‘지(知)를 가진 사람(有知之士)’이 아닌 ‘식(識)을 지닌 사람(有識之士)’를 숭상했는가 하는 리유이다. 공산당 통치 하에서 중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지(知)만 있고 식(識)이 없는 사람들과 지(知)만 있고 감히 식(識)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해졌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배양하는 데 있어서도 학생들에게 공산당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몇년 동안, 학교에서는 정치과목과 당사(黨史)를 설치하였고 통일 교재를 사용하였다. 교사들은 교과서의 일부 내용을 믿지 않지만 ‘규률’에 강요되어 량심을 어기는 말을 한다. 학생들도 교과서와 교사들의 강의를 믿지 않지만 기계적으로 외워 시험에 응할 수 밖에 없다. 중학생과 대학생들의 기말시험과 입학시험 문제 중에 파룬궁을 비판하는 제목이 나타났는데 표준 답안을 외우지 못한 학생들은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하여 좋은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만약 아이들이 참말을 하기만 하면 바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진학자격을 박탈당한다.
민중교육 중에서 신문과 문건의 영향을 받아, 사람마다 귀에 익어 줄줄 외울 수 있는 말들, 예를 들면 “무릇 적들이 반대하는 것이면 우리는 옹호하고, 무릇 적들이 옹호하는 것이면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는 모택동의 어록을 ‘진리’로 삼아 악한 영향을 많이 일으켰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되여 사람들의 선(善)을 향한 마음과 화목을 중히 여기는 륜리 도덕을 대체하였다.
2004년 중국정보센터에서 대륙 신랑망(新浪網)에서 조사한 상황을 통계 분석한 데 의하면 82.6%의 중국청년들이 전쟁 중에 여성, 아동 및 전쟁 포로를 학대하는데 찬성하였다. 이런 결과는 매우 뜻밖이긴 하지만, 중국 민중들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특히 청년 세대는 전통 문화 중 어진 정치(仁政), 인성(人性)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2004년 9월 11일 강소(蘇州)의 한 미친 남자가 28명의 어린이를 칼로 찍어 죽였고, 9월 20일 산동(山東)의 한 남자는 어느 소학교에서 25명이나 찔러 다치게 하였다. 또 어느 소학교에서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 교사들이 학생들을 강요하여 수공(手工)으로 폭죽을 제작하다가 폭발 사고를 일으킨 사건도 발생하였다.
정책 집행과 관철: 공산당의 지도 하에 정책 집행은 늘 강요하고 위협하는 수단을 사용한다. 정치 표어는 바로 이런 수단의 일종이다. 오랫동안 공산당의 정책은 표어를 붙인 수량을 가지고 성적을 가늠하는 표준의 하나로 삼았다. 문화혁명 기간에 북경은 하룻밤 사이에 표어가 가득 나붙은 ‘붉은 바다’로 변해 버렸는데 ‘당내에서 자본주의의 길로 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는 표어가 도처에 나붙었다. 농촌에서는 간략하게 ‘집권파를 타도하자’라고 썼다.
근래에 『삼림법(森林法)』을 선전하기 위해 림업국의 각 림업사업소, 삼림보호 사무실에서는 반드시 표어를 충분히 붙여야 한다는 강제 지표를 하달하여 숫자가 부족라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기층 정부 부문에서는 대량의 표어를 내붙였는데 예를 들면 “산불을 내면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등이다.
최근 중국의 계획생육 운동 중에는 사람을 더 놀라게 하는 표어들이 나왔다. “한 사람이 더 태여나면 온 마을사람들을 절육시킨다.” “무덤 하나를 보탤지언정 사람을 더 보태지는 않는다.”, “절육해야 할 사람이 안 하면 집을 부숴버리고 류산해야 할 사람이 하지 않으면 밭을 회수하고 소를 끌어간다.”는 등이다. 더 심한 것은 인권과 법률을 위반한 표어들도 있다. 예를 들면 “오늘 세금을 내지 않으면 래일은 감옥에서 자야 한다.”는 것도 있다.
표어란 본질적으로 일종의 전파수단으로서, 직관성과 반복성을 갖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를 리용하여 정치 동향 및 정부 의지를 표시하거나 호소한다. 정치 표어는 또 정부가 인민들에게 하는 연설로도 볼 수 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의 폭력 성향과 피비린내 나는 잔인함을 보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8. 전국적인 세뇌와 연금
중국 공산당의 가장 지독한 폭정 통치 도구는 그물식 통제이다. 공산당은 매 사람들에게 조직의 형식으로 견유주의를 가했다. 그것은 앞뒤 모순을 아랑곳하지 않고 모순되게 제멋대로 하는데 바로 조직의 형식으로 개인의 타고난 인권(人權)을 박탈하는 것이다. 정부의 통치는 촉각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인민은 모두 가도(街道)위원회 혹은 향(鄕)위원회에서 관리한다. 결혼, 리혼, 해산은 모두 그들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당의 의식형태, 사상체계, 조직방식, 사회구조, 선전기제, 운영체계는 모두 이러한 독재통치를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당은 정부 체계를 통해 매 개인의 생각과 매 개인의 행동을 통제한다.
공산당 통제의 잔혹성은 다만 육체적인 시달림 뿐만이 아니며,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독립적 견해가 없도록 변화시키거나, 혹은 독립적인 견해가 있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고 겁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의 통치 목적은 사람마다 세뇌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공산당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공산당이 말하는 것을 말하게 하며, 공산당이 주장하는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산당 정책은 달과 같아서 초하루와 보름때가 다르다.”라고 한다. 그러나 공산당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전국 인민들은 모두 공산당을 바싹 따라야 한다. 공산당이 당신에게 다른 사람을 타격하는 역할을 맡길 때 당신은 공산당이 ‘인정해 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하고, 당신이 타격을 받을 때는 공산당이 ‘교육시켜 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한다. 공산당이 당신을 타격한 것이 잘못임을 알고 당신에게 명예회복을 시켜줄 때도 또한 공산당의 ‘넓은 도량과 잘못을 알고 고칠 줄 아는 것’에 감사드려야 한다. 공산당의 폭정은 바로 끊임없이 공격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에서 시행되고 있다.
55년의 포학한 통치를 통해 중국 인민들의 사상은 이미 연금(軟禁)되어 공산당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 자신을 속박해 놓았다. 테두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곧 죄가 된다. 반복적인 투쟁을 통하여 우매(愚昧)함은 지혜로 찬양받았고 나약함은 이미 생존방식으로 되었다. 인터넷이 정보교류의 주요한 전파수단으로 된 현대 정보사회에서, 인민들이 인터넷에 들어가는 것까지 자신을 단속해야 하며, 외부 소식을 보지 말아야 하고, ‘인권, 민주’ 글자가 있는 웹사이트도 보지 말아야 한다.
공산당의 세뇌 운동은 이처럼 황당하고, 이처럼 잔인하며, 이처럼 비루(鄙陋)하고, 이처럼 없는 곳이 없다. 그것은 중국 사회의 가치관 및 륜리 도덕을 변화시켰으며, 중화민족의 행동법칙과 생활방식을 철저하게 뜯어 고쳤다. 아울러 육체와 정신에 대한 끊임없은 박해로 공산당 일당 독재의 절대적인 권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였다.
결론
이상 말한 것을 종합해 보자. 공산당은 무엇 때문에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투쟁하며 생명이 멈출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는가?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살인을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며,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중국 대부분의 농민 및 도시 주민들이 장기간 빈곤한 상태에 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가?
이것은 공산주의의 리상(理想)을 위해서인가? 아니다. 공산주의의 원칙 중 하나는 일체 사유재산제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는 일체 죄악의 근원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정권을 빼앗은 초기에 역시 전면적으로 사유재산제도를 없애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래, 사유재산제도는 이미 중국에서 부활되었으며, 『헌법』에도 사유재산을 보호한다고 규정하였다. 공산당의 40년 통치는 재산 재분배란 희극을 연출하여 몇 개의 륜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資産)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은 것에 불과하다.
공산당의 다른 원칙 중 하나는 공산당이 ‘로동자계급의 선봉대’이며, 그 임무가 자본가계급을 소멸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공산당의 당장(黨章) 중, 이미 자본가도 입당할 수 있다고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공산당 내부에도 이미 더이상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이 없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도 조리가 서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공산당은 현재 껍데기만 남았으며 이미 본질은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면 이런 장기적인 투쟁은 공산당 집단의 청렴과 순결함을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공산당이 55년 집권한 이래 현재 전국 공산당 간부들은 탐오하고 뢰물을 받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함부로 행하고,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약 2천만 명의 당과 정부 관원 중 최근 몇년 동안의 조사결과, 이미 8백만 명이 탐오부패 범죄로 인해 처벌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아직 조사받지 않은 탐오부패 관리를 고발하기 위해 신소부문을 찾는 사람의 숫자가 매년 백만 명에 달한다. 2004년 1월에서 9월까지만 해도 중국 국가외화관리국에서 35개 은행과 41개 기업에서 규정을 어기며 무역결재업무를 처리한 것에 대해 조사했는데, 그 금액이 무려 1억2천만 딸라에 달했다. 통계에 의하면 최근 몇 년간, 돈을 가지고 몰래 달아난 당과 정부 간부가 수두룩한데 나라의 공금을 훔친 것이 수억 딸라에 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투쟁은 인민의 소질과 각오(覺悟)를 제고하여 사람들에게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게 하려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오늘의 중국은 물욕(物慾)이 넘치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으며, 부모를 속이고 친구를 살해하며 림기응변에만 능하다. 많은 중국인들은 원칙문제에 대해 몰라서 말하지 않거나, 알아도 말하지 않는 것이 중국에서 무사히 생존해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민족주의 정서는 여러 차례 근거 없는 헛소문에 의해 선동을 받았는데 중국 정부는 인민들을 조직하여 가히 중국 주재 미국대사관에 찾아가 돌을 던지고 불을 질러 미국 국기를 불태우게 할 수도 있다. 중국 인민들은 ‘순종하는 백성[順民]’ 또는 ‘난폭한 백성[暴民]’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있어도 인권이 보장되는 공민(公民)은 되지 못한다. 문화적인 수양은 소질을 높이는 근본이다. 중국은 수천년 동안 공자와 맹자(孔孟)의 도리로 사람들에게 례의의 기강(紀綱)을 만들어주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을 폐기한다면 사람들은 따를 법이 없게 되고 옳고 그름도 가리지 못하며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이것은 도가 크게 어지럽게 된 것이다.”
결국 공산당의 투쟁철학은 큰 난을 만드는 것으로 끊임없이 동란(動亂)을 만들어서 ‘일당 천하’의 교주(敎主)지위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다. 즉, 공산당 유일 사상으로 전국 인민을 통치하는 것인데, 정부 기구, 군대, 신문, 방송국은 모두 공산당이 폭정(暴政)을 실시하는 도구이다. 공산당이 중국에 가져다준 위해(危害)는 이미 병이 심해져 치료할 수 없는 상태로 되었다. 공산당은 이미 멸망의 변두리에 처해 있으며 그것의 해체는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해체되면 천하에 큰 란리가 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누가 공산당을 대체하여 중국을 통치할 수 있겠는가 하고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5천년의 기나긴 중국 력사 중에서 공산당의 55년 통치는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하며, 이 짧은 55년 중 전통적 신앙과 가치관이 공산당의 강압에 의해 파괴되었다. 고유의 륜리관념과 사회체계는 강제적으로 해체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및 화목은 투쟁과 원한으로 왜곡되었다. 천지자연에 대한 경외(敬畏) 및 소중함이 함부로 잘난 체하는 ‘인간의 힘이 자연을 이긴다.’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가져다 준 사회도덕체계와 생태체계의 전면적인 붕괴는 전체 중화민족을 매우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하였다.
중국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중국 역대의 어진 정치[仁政]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며(愛民)’,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富民)’, ‘백성을 가르치는(敎民)’ 것을 정부의 기본 직책으로 간주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선(善)을 지향하는 본능이 있으며 정부는 인민을 도와 이런 본능을 실현시킬 책임이 있다. 맹자(孟子)는 “백성의 도를 말하자면, 고정적인 자산(恒産)이 있는 사람은 항심(恒心)이 있고, 고정적인 자산이 없는 사람은 항심(恒心)이 없다.”고 했다. 부유하지 못하면서 교육을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포학이라 할 수 있다.
상하 5천년의 기나긴 중국 역사 중에서, 어진 정치를 실시한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고대에는 요순(堯舜)이 있었고, 주(周)나라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있었으며, 한나라에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있었고, 당나라에는 정관(貞觀)의 다스림이 있었고, 청나라에는 강희(康熙)와 건륭(乾隆) 황제가 있었다. 이와 같이 각 조대(朝代)의 흥성한 시기에는 어느 하나도 ‘왕도(王道)를 행하고’, ‘중용을 지키며’, ‘평형을 이루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진 정치의 특징은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고, 누구나 말할 수 있게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주며, 의리를 지키고 화목을 구하며 백성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데 있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능히 례의를 따르고 법을 준수하며 평안하고 조용히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천하의 세력을 가늠해 본다면, 흥성과 멸망은 그 누가 결정하며, 번성과 쇠퇴에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공산당이 사라지면 세상은 상서롭고 온화한 분위기를 되찾아 백성들로 하여금 진실하고, 선량하며, 겸손하고, 참고 양보하게 되리라. 그리하면 국가는 겸허히 백성들의 일상사를 돌보게 될 것이며 온갖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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