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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에서 살아남은 미국인 고아의 실화(1)

편집부  |  201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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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웨윈, 린판


[SOH]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의 폭풍우. 그것은 중국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숙청 작업이었다. 박해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명을 끊거나 고문으로 생명을 잃은 지식인은 수백만 명에 이른다. 심원한 중화 민족의 전통 문화도 이 때 모두 파괴되었다. 그런 광기의 세월에서 살아남은 미국인 고아가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학교 내 대자보는 교내에 미 제국주의와 연결된 스파이들이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불길한 기색을 느낀 한슈(韓秀)는 신장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9년간 그녀는 움막에서 삶은 배추와 옥수수 빵으로 굶주림을 견뎠다. 극도로 어려운 육체노동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마음의 버팀목은 그곳에서 살아서 나가겠다는 의지였다.

 

                                                     •        

 

1948년 9월,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던 한 척의 미국 군함 갑판에서 젊은 미국인 부부와 아들 존, 그리고 2살의 여자 아이 테레사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뉴욕에서 온 일행은 샹하이를 향하고 있었다. 미국인 부부는 선교사인 부모님을 설득해 위험과 동란으로 가득 찬 중국에서 하루빨리 부모님을 모시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당시의 중국은, 공산당 군대가 구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동북에서 국민당군과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군함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인파 속에는 테레사의 할머니가 있었다. 걱정스러운 듯이 곱슬머리 어린 손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 노인은 매우 품위 있고 온화해 보였다. 미국인 부부의 불안이 녹았다.
 

한슈(테레사의 중국 이름)는 중학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할머니로부터 자신은 뉴욕에서 태어났고아버지 윌리 한옌은 미국 외교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인 유학생이었고, 1943년부터 45년까지 아버지는 중국의 항일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중경에 배치되었다.


할머니는 국민당 정부를 따랐기 때문에 대만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테레사를 기다리기 위해 상하이에 머물다 일생동안 중국을 떠나지 못했다.


‘이 학생은 대학에 입학시킬 수 없다’
  
선천적으로 서양인 얼굴에 곱슬곱슬한 고수머리의 한슈가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워도, 아무리 예의 바르고 우수해도 중국 사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시대 그 환경에서 자신은 어디까지나 외국인이었다. 다행히도 할머니의 세심한 애정으로 한슈는 건강한 아가씨로 성장했다. 한슈의 할머니는 문학에 정통한 일본 제국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으로 유년기의 한슈에게 유일한 의지처가 되었다. 일본 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던 할머니는 어린 한슈에게 ‘3자경(三字經)’, ‘천자문’ 등을 배우게 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덕을 가르쳤다.
 



한슈의 할머니는 특별한 여성이었다. 30대에 남편을 잃은 이후 독신으로 살았다. 교통 은행에 다니며 국민당 정부를 도왔고, 1949년 이후에는 북경에 정착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정부는 그녀에게 정부에서 일할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나는 고지식해서 일생동안 한 명의 남성에게 시집가고 하나의 정부에 봉사한다’ 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한슈는 소녀시기를 북경에서 지냈다. 제12여자 중학교 때부터 베이징대 부속고등학교까지 그녀의 성적은 쭉 1등이었다. 그러나 미국인 혼혈이라고 하는 문제가 그림자같이 항상 그녀를 따라다녔다. 할머니는 ‘제대로 학교 공부를 하면, 누구도 너를 어떻게 할 수 없다. 너 자신을 믿고 네 행동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무슨 말이 들리던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녀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눈 깜짝할 새에 그녀는 17세가 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됐다. 베이징시에서 우수 졸업생에게 주는 은메달도 받았다. 그녀는 대학입학 지원표의 8개 모두에 ‘칭화대’라고 기입했다. 미국인 혈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학 입학 여부도 불투명한데 게다가 명문인 칭화대만 지원한다면 탈락 위험이 너무 높다고 생각한 선생님은 그녀를 설득했다. 그녀는 지원표를 정정해 관심이 없는 대학 이름들도 썼다. 그러나 이후 발표된 대학 합격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녀를 매우 예뻐한 수학선생님은 정부 관련 기관을 방문해 불합격 이유를 물었다.
 

선생님은 봉인된 그녀의 답안지 앞면에 씌어진 ‘이 학생은 대학에 입학시키지 않는다’는 문구를 봤다. 그녀의 답안지는 채점조차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곧바로 학교 공산당 위원회 서기가 그녀를 호출했다. 부친과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맹세하는 진술서를 쓰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쓰지 않으면 산서성 농촌에 이주시킨다고도 말했다. 당시 17세였던 그녀는 당 서기에게 “그러면 빨리 집에 돌아가 짐을 꾸리겠다”고 말하고 담담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농촌으로 이주했다. 때는 1964년이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의연한 태도를 취했을까?


한슈는 아버지가 중국에 머물렀던 1943년부터 45년까지 미국은 중국을 도왔고, 아버지는 조금도 중국을 거역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으므로 절대로 아버지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천애고독
 

1964년, 구 소련 최고 지도자 후르시쵸프(Khrushchev)가 실각하고, 중국이 처음 원자 폭탄 실험을 실시한 해에 한슈는 베이징의 43명의 젊은이와 함께 산서성 곡옥현 봉성공사 림죠대대로 이주했다. 그곳은 면과 보리 생산지로, 매일 끝없는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슈는 매일 농민들과 함께 밭농사를 지었다. 그 와중에 마을의 방송원이나 초등학교 교사 일도 했다. 또 ‘사회주의 교육 운동’, ‘4청운동’, ’문맹 박멸 운동’ 등 수많은 이데올로기 선전도 만났다. 그녀는 중국의 농민에 대해 서서히 알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박하고 선량하며 특히 여성들은 곤란한 생활도 묵묵히 참으면서 강건하게 생활했다. 그 강한 생명력에 한슈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이런 평정한 생활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베이징대 녜웬쯔(聶元梓) 교수가 정부를 공격하는 대자보를 발표하고, 마오쩌둥이 ‘지령부를 포격한다’는 글을 통해 지지를 표명하자 비난의 화살은 당시 국가 주석 류샤오치(劉少奇)를 향했다. 또 베이징의 ‘홍위병’은 당시의 전인대위원장 펭전(彭真)의 고향인 산서성에 들어가, 펭전의 옛 집에 잠복하고 있는 적을 찾아내려고 했다. 한슈가 있던 현 내에서도 누가 체포되고 누가 자살했다는 정보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근무하는 학교에도 대자보가 나붙어 교내에 제국주의 미국과 연결된 스파이가 숨어있다고 암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생산 건설 군단을 따라 신장으로 옮길 것을 결심했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권총을 들이대는 것보다는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작은 씨앗과 같이 시대의 거센 파도에 휩쓸려 고비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곧 신장 생산 건설 군단의 ‘농업 3사 제48단 제5련’에 배치되었다. 본부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중심부에 인접한 마르키트현에 있었고, 그녀가 소속된 연대는 마라르베시현에 있었다.
 
 그녀는 남(南) 신장에서 9년동안 있었다. 그곳은 외진 벽촌으로 완전히 미개발 지구였다. 바람이 강할 때에는 사막의 모래가 천지를 가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람과 부딪쳐도 상대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아 지면에 엎드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눅눅한 움막에서 매일 삶은 배추와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먹으며 극도의 중노동을 참아냈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아파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유일한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는 것, 산 채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생활의 전부였다고 한슈는 말했다.
  
현지의 위구르인과도 사이가 좋아졌다. 스스로의 조상은 메카의 서쪽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위구르 사람들은 한슈가 그곳보다 더 먼 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점차 호감을 갖고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현지 사람들의 종교 신앙을 존중하고 유창한 러시아어(현지 95%의 위구르인들은 러시아어를 말할 수 있었다)로 위구르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한족의 말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하는 위구르인 학생도 여러 명 있었다.

 

가장 대하기 어려운 것은 군단 내부 사람들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나서 숙청 운동은 파도같이 잇따라 덮쳐 왔다. 사람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한슈는 아직 숙청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방관자로서도 매우 마음이 괴로웠다.
 

그 9년동안, 신념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국경 지대의 고비사막으로 갔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죽었다. 그러나 그때의 경험으로 그녀는 중국 사회 그리고 중공 정권의 본질을 판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당신이 무언가에 의혹을 갖기 시작하면 당신을 개조하려고 한다. 개조할 수 없으면 당신을 없애려고 한다. 어떻게 없애는가? 당신을 그곳(신장)으로 보낸다. 그곳의 생활은 매우 괴로워 목숨을 쉽게 잃는다. 그렇게 해서 철저하게 당신의 육체를 소멸시킨다. 수십 년간 중공의 수단은 변함이 없다. 지식인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다른 계층에 대해서도 동일한 수법을 사용한다.”

 

(계속)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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