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耽羅國)의 조공
탐라국은 식민사학에 의해 제주도(濟州道)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열도의 황국사학자들에 따르면 신공(神功)이 2차 신라 정벌(AD 249년)에서 항복을 받아 백제국에게 주었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서기는 이러한 탐라국이 AD661년 제명왕 때에 처음으로 왜에 조공을 하기 시작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명(濟明)7년(AD 661년) 5월의 기록을 보면,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피지를 보내 조공을 보냈다.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탐라왕자(王子)는 직접4회, 좌평(佐平:국무총리)은 3회에 걸쳐 조공을 바쳐서 왜왕은 견, 면직물 ,염색옷감, 도끼 칼 등을 하사하고(AD 667년), 오곡(五穀)의 종자도 준다고 기록되어 있다(AD669년).
그러면 탐라국은 과연 한반도의 제주도일 수 잇는지 다른 역사서에서 찾아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 (AD476)에 보면,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서 사신을 은솔(恩率:3품)로 임명하였다.
라고 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년(AD 662년)에 보면,
탐라국왕 좌평 도동음율(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武德: AD 618년) 이래로 백제의 속국이 되었기 때문에 좌평으로 벼슬을 청하였고 이 때에 이르러 항복하여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원문 생략).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9년에(AD 679)에 보면,2월에 사신을 탐라국에 보내 순시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한대로 탐라는 왜에 조공을 바치기 전에 백제의 속국이었고, 백제가 당나라에 멸망한 다음에는 신라에 항복하였다.(AD662년). 따라서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고, 신라로부터 감사 성격의 순시까지 받는다고 하는 탐라국이 같은 때 왜국으로 토산 방물을 바치러 갔다고 하면, 어지러운 조공절차가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탐라가 어디에 있었든 신라의 속국이면 신라에 조공을 바치면 되는 것이지 왜국 이라고 만들어진 열도로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탐라국에 대한 대륙 사서에 기록은 <원사(元史)>에 나온다.
탐라는 고려국에 있었다. 원나라 세조<世祖:1260~1293:고려 원종(元宗)시 고려가 신하국으로 되었을때 탐라는 남송(南宋)이 되었고 , 해뜨는 동쪽의 요충지 였다.~ 또한 탐라국왕은 일찍이 원나라에 조공과 문안을 올렸다.~(탐라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원나라 주둔군 1700명을 두었고 해마다 모시포 100필을 바쳤다.~난이 평정된 후 초토사를 둔후 다루하치(신탁 집정관) 총관부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사(元史)의 기록을 보면 탐라는 분명히 한반도 섬나라 제주도가 될 수 없다. 탐라는 분명히 남송(南宋)에 속해 있던 나라였고, 후에 다시 원나라가 남송을 정벌하자 원나라 소유가 되었으며, 고려가 돌려달라고 (공민왕16년:AD 1367년)하여 돌려줌으로써 고려의 소유가 된 것이다.북송(北宋)이 금나라에게 멸망함으로써 남송(南宋)이 건국된 곳은 절강성 항주(抗州)였다. 만약 이 곳에 도읍을 정했던 남송의 탐라국이 동쪽의 요충지로 있었다고 하면, 그런 탐라국은 한순간도 한반도 남단 섬나라 제주도가 될 수가없다. 탐라 자체도 대륙에 있었고 원사(元史)에 기록된 고려도 대륙에 있었던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고려는 다시한번 쓰지만 대륙에 있었던 나라임).탐라국을 한반도 제주도로 할 경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원사(元史)>에 탐라국에서 조공으로 해마다 모시로 짠 옷감을 100필씩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시라고 하는 것은 숙근초(宿根草) 식물은 일명 저마(苧麻)라고 하며, 이것을 실로 만들어 옷감으로 만든 것이 모시포라고 한다 . 이 모시풀은 한반도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하천을 끼고 있는 습지대에서 특산물로 재배되기 때문에 한산모시가 으뜸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모시는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도 특산물로 기록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 또한 화산지대로서 습지대를 만들 수 있는 지형과 지질이 아니다. 이와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모시를 원나라에 특산물로 바쳤다고 하는 탐라는 한반도의 제주도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탐라국을 제주도로 볼 경우에는 또 다른 해결할수 없는 문제가 제기된다.
대륙 사서와 일본서기에 있듯이 탐라국왕(王) 탐라국주(主)가 백제,신라에 항복을 하고,
탐라국 왕자, 좌평 등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하거나 왕자가 직접 조공을 바쳐 왜국에서
사은품도 받아갔다고 하면, 탐라로 만들어진 제주도는 왕국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원사(元史)>외이(外夷) 열전에 탐라가 고려, 일본과 함께 별도의 나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탐라는 결코 한반도 끝에 자리한 조그마한 절해고도였다고 볼 수가 없다. 원나라 ,백제, 신라, 왜(倭) 로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탐라를 제주도로 만들면, 탐라국 제주도는 백제 문주왕(文周王: AD 476년) 때부터 원사에 기록된 14c 중반까지 약 900년간 국가체제를 갖춘 왕국이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필자가 탐라국으로 만들어진 제주도에서 3년을 살면서 구석구석을 뒤져보아도 왕국과 나라의 흔적은커녕 목사(牧使)가 있었다고 하는 <세종실록지리지>의 흔적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탐라가 최소한 900년 동안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수많은 왕들과 왕비 ,왕자 , 공주, 조정 중신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탐라국이 제주도처럼 고립된 지역이었다면 왕과 왕손 , 대신들의 묘지는 모두 현재 제주도섬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현재 한반도에 있는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비석 조차도 볼수가 없었다는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뿐만 아니라 탐라국이 왕과 정부가 있어서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를 설정할 정도였다면 기본적으로 대궐터와 왕궁터, 정부관청의 유허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그림자도 찾을수가 없다. 그런데도 야심에 가득찬 반도의 무지한 관변사학자들은 지금도 실증사학을 핑계로 줄기차게 제주도가 옛날의 탐라국이였다고 넋두리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러고도 사학자라고 하고 있으니 학자의 양심이란 것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열도의 사학자들이야 <일본서기>에 의한 황국사관으로 치장되어 만들어진 자국 역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억지를 부린다고 할 수 있지만,반도의 역사 학자들이 열도 사학자들의 보조개로 붙어 있을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가? 반도의 관변 사학자들이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반도에 그 어떤 나라가 있었다고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유물을 발굴한다고 설치면 설칠수록, 역사를 포장하면 포장할수록, 우리 한민족은 역사속에 영원한 피지배국 ,피정벌국, 예속국,왜의 내관가(內官家)의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땅에서 자라나는 후손과 후학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민족의 정신사, 철학, 자연사를 외면한 채 역사 교육을 시킨들 그 젊은이들이 무엇을 터득하여 세계의 무대에 설수 있겠는가 ? 한민족의 역사를 역사서 원전에 실려 있는데로 탐구하고 해석하여 고학적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배우지 않으려면 현재 가르치고 배우는 혼(魂)이 빠져버린 역사교육은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