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안방극장까지 파고든 김정일
여성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과 북한의 핵전쟁 위기 그린 ABC드라마 `최고사령관` 인기
영화 `팀아메리카` 등 오락물에 잇달아 등장하는 `김정일 스토리`는 흥행 블루칩
- 조선닷컴의 톱뉴스
“만약 우리의 평화로운 구조작업을 방해할 경우 그것은 전쟁행위(Act of War)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 지난 1월 17일 미국 대통령은 ABC TV를 통해 선전포고에 가까운 최후통첩을 유엔 주재 북한대사에게 전달했다. 물론 미국 전역에서 3000여명만이 지켜본 대통령의 이 발언은 실제상황이 아니다. ABC의 시리즈 드라마 ‘최고사령관’(Commander-in-Chief) 속의 ‘핵 없는 행복한 세상’(No Nukes is Good Nukes)이라는 편에 나오는 픽션이다.
매주 화요일 저녁 9시에 방영되는 ‘최고사령관’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탄생된 맥켄지 알렌(지나 데이비스 분)을 주인공으로 한 백악관 스토리다. NBC가 백악관을 소재로 해 성공했던 웨스트 윙(West Wing)과 비슷한 구성의 드라마로, 2008년에 닥칠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 장관 간의 ‘여성 대통령’ 대결을 염두에 둔 ABC의 야심작이다. 매주 특별한 이슈를 주제로 ‘마담 프레지던트’(Madam President)의 리더십이 발휘되는 드라마 ‘최고사령관’은 현재 미국의 3대 네트워크를 통틀어 공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북한을 소재로 한 ‘핵 없는 행복한 세상’이란 프로그램은 1월 10일 제10회에 시작된 두 편짜리 에피소드다. 스토리는 미국의 잠수함이 북한의 원산 근처 바다에 좌초되면서 시작한다. 잠수함이 북한 해역에 들어서자 북한은 즉시 “미국에 의한 도발”을 선포하면서 전쟁준비에 들어간다. 북한은 “핵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결의로 미국의 목을 조른다. 잠수함의 상태를 조사하러 갔던 미국 정찰기가 북한군의 포격으로 파손을 입고 돌아오면서 긴장은 최고조에 달한다.
美 잠수함, 북한 해역에 좌초
북한 해군이 미국 잠수함을 나포하기까지 36시간이 남은 시점에서 여성 대통령 알렌은 중국대사를 불러 구조협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중국대사는 북한이 동맹국임을 내세워 직접 개입하기를 꺼린다. 알렌이 유엔 주재 북한대사를 백악관으로 부른 것은 마지막 해결책이었다. 대통령이 평양에 전달해줄 것을 요청한 내용은 미국이 취할 입장과 북한에 대한 보상이다. “비무장 구조선이 잠수함을 구하기 위해 북한해역에 들어간다. 만약 북한이 이들을 공격할 경우 미국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비무장 구조선의 출입을 허용할 경우, 5억달러의 현금을 북한에 넘길 것이다. 현금은 인도주의적 지원이란 목적하에 평양에 전달된다.”
알렌은 북한의 대답에 기대를 걸지만 만약 북한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대응책을 논의한다. 일부 참모는 “미국과 북한이 충돌할 경우, 90일 동안 35만명의 미군이 사상될 것이며 핵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렌 대통령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155명의 잠수함 승무원을 버릴 수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북한이 구조선을 공격할 경우 절대우위의 무력으로 대응할 것”을 명령한다. 알렌의 명령은 평양에 대한 핵공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북한을 상대로 핵 전쟁 위기를 헤쳐나가는 에피소드를 그린 ABC 드라마 ‘최고사령관’.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상황에서 북한의 유엔대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평양의 지도부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의 공식사과를 듣기를 원한다”는 요구였다. 알렌 대통령의 대답은 “예스(Yes)”였다. 비무장 구조선이 북한해역으로 들어서기 직전 잠수함 근처에 집결해있던 북한의 군함과 공군은 일시에 후퇴한다. 순간 백악관 상황실에 모여있던 대통령과 참모 사이에는 기쁨의 환성이 터진다. 155명의 잠수함 승무원이 위성 카메라를 통해 알렌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핵전쟁의 위기가 사라진다.
북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미국의 전국 네트워크 황금시간대를 통해 방송된 것은 이번 ABC가 처음이다. NBC의 웨스트 윙을 비롯해,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북한 문제가 대통령의 리더십을 시험하는 테마로 자리잡은 것이다.
‘핵 없는 행복한 세상’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질 경우 예상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둔, 다큐멘터리에 가깝도록 만든 드라마다. 드라마 속에는 북한 전문가가 등장해 “협상용으로 북한은 달러를 원할 뿐, 무조건 목숨을 거는 무슬림의 자살공격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전쟁이 터질 경우 북한의 무차별 미사일 공격으로 서울시민 100만명이 죽을 것’이란 정보도 흘러나온다. 드라마는 각종 팩트에 근거해 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 이상으로 북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핵 없는 행복한 세상’은 그 동안 백악관과 국방성이 10여년 이상 씨름해왔던 북한 관련 이슈를 한순간에 미국의 일반 국민에 알려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북한을 테마로 한 드라마가 ABC의 황금시간대를 차지했다는 것은 북한 관련 오락물이 흥행을 보장한다는 인식이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4년 10월 개봉된 미국 파라마운트사의 인형극 영화인 ‘팀아메리카’(Team America)는 ‘북한 이야기야말로 흥행의 블루칩’이란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이 영화의 제작자는 미국 인기 희극영화 ‘사우스파크’(South Park)의 대본작가 매트 스톤과 트레이 파커다.
일본, 중국 이어 ‘007’시리즈 등장
인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팀아메리카’는 세계평화유지를 위해 창설된 미국의 비밀경찰이다. 이들은 김정일이 주축이 된 대량살상무기 거래조직의 실상을 알아채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공작에 나선다. 연극배우 출신인 주인공 게리가 테러리스트로 가장해 중동지역 테러리스트 일당을 일망타진한 데 이어, 김정일의 평양 주석궁에 침입해 대량살상무기 확산음모를 저지한다. 영화 속에서 인민복을 입은 김정일 인형은 큰 안경을 쓴, 잔인하면서도 낭만적인 면이 있는, 걷잡을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예측불가능한 김정일은 ‘미스터 킴(Mr. Kim)’이 아닌,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따 ‘미스터 일(Mr. Il)’로 호칭된다. ‘미스터 일’이란 ‘악(惡)’ ‘불행’ ‘병(病)’ 등을 의미하는 영어의 ‘ill’을 연상하는 말이다. (ㅋㅋㅋㅋ)
▲ 파라마운트사의 인형극 영화 ‘팀 아메리카’에 등장한 김정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맞아 개봉된 ‘팀아메리카’는 개성 강한 김정일 인형을 등장시키며 외국 문제에 관해 무관심한 미국 젊은이에게 절대적인 호평을 얻는다. 10대, 20대의 MTV 시청자를 북한의 ‘김정일 팬’으로 만들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청년층은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오락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엔터테인먼트 소비자다. ‘팀아메리카’는 외교 차원에 머물던 복잡한 북한 문제를 청년층이 즐길 수 있는 오락물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데 기여한 셈이다.
북한을 주제로 한 오락물로는 20번째 007시리즈인 ‘어나더데이’(Die Another Day)를 빼놓을 수 없다.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에 한국계 릭윤이 출현한 ‘어나더데이’는 한국에서 상연되기 전부터 화제가 됐다. 북한의 잔인성이 과장되고 한국인의 민족정서에 어긋나는 장면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미국에서의 큰 관심과 달리 북한 당국의 맹비난과 한국 시민단체들의 상영금지 운동에 힘입어 한국에서의 흥행은 실패로 끝난 영화이다.
007시리즈는 세계의 관심거리가 되는 서방의 적대국을 소재로 만들어온 영화다. 전통적으로 007 제임스 본드의 임무대상은 서방의 적국이거나 라이벌 또는 테러리스트 등으로, 1990년대 이전의 냉전시절만 해도 소비에트와 주변의 동구유럽 위성국가가 주된 작전지역이었다. 아시아의 경우 1967년 일본이 ‘007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주연 숀 코너리)로 처음 등장한 이래, 냉전이 끝난 1997년 중국이 ‘네버다이’(Tomorrow Never Die, 주연 피어스 브로스넌)로 데뷔하게 된다. 북한은 일본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로 선정된 곳이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지역이 007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스토리를 위한 소재 정도로 활용됐을 뿐이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미국의 오락물 소재로 자리잡게 된 것은 2001년 부시 정부의 출범 때부터다. ‘악의 축’으로 규정된 북한은 다른 ‘악의 축’ 멤버인 이란과 이라크가 보여주지 못하는 아시아적인 스릴과 서스펜스를 제공했다. 일사불란한 군인들의 퍼레이드와 소비에트 시대를 연상시키는 미사일의 행렬, 중국 문화혁명 때의 흑백필름을 돌리는 듯한 카드섹션 등은 ‘통 큰 김정일’과 더불어 북한에 대한 흥미를 자극하는 트레이드 마크다.
그러나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흐름을 살펴보면 북한에 앞서 이미 한국이 상당부분 등장해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국 TV 드라마 가운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CBS의 ‘MASH’(육군 이동병동)가 원조라 할 수 있다. ‘MASH’는 1972년부터 11년간 CBS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된 드라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서울 근처에 위치한 미 육군 이동병동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모은 코미디다. ‘MASH’는 20여년 전에 끝났지만, 아직도 케이블방송을 통해 미국 어딘가에서 방송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북한과의 핵 전쟁 상황을 가정한 ABC TV의 드라마 ‘최고사령관’은 1970년대의 ‘MASH’에서 눈길을 끌었던 ‘사우스 코리아’로부터 미국인의 시선을 ‘노스 코리아’로 돌리는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핵 개발국에서부터 위폐 제조국과 마약 밀매국으로 의심받고 있는 북한은 미국의 흥행사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고수익 블루칩’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워싱턴=유민호 자유기고가 silkroad100@hotmail.com
입력 : 2006.02.11 14:40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