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한국말로 ‘빨리 빨리’란 말만 외쳐댔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안간힘을 썼죠.” 1950년 12월22일 함경남도 흥남부두 철수의 주역은 긴박한 순간을 회고했다. 당시 23세의 나이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일등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씨는 1만4000명을 구조해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오른 빅토리호 신화의 주역이었다.
“피란민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있었습니다. 노인들, 목발을 짚고 있는 불구자들, 엄마 젖을 빨고 있는 아이들, 들것에 실려온 부상자들…. 영하 20도의 눈보라 속에서 승선하는 데만 16시간이 걸렸죠.” 그 밤의 흥남부두는 아비규환이었다. 중공군이 저 멀리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고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피란민들은 육지의 마지막인 부두까지 몰렸다.
당시 배에는 마실 물도, 화장실도 없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서로 꼭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어머니들은 아기를, 아버지들은 아이를 품에 꼭 안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러니씨는 회고한다. 빅토리호는 기뢰밭을 뚫고 3일간의 항해 끝에 크리스마스인 12월25일 거제도에 도착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고, 배 위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고생스럽기는 중공군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병참 보급이 없었다. 단지 한 주분의 미숫가르가 호주머니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군복은 솜옷이었는데 그 추운 겨울 강을 건널 때 솜옷을 물에 젖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으며, 논보라 위에서 잘 때 살을 에었다. 그들은 살아돌아 오도록 전투에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백만 대군의 그들은 인해 전술로 돌진하다가 전투지에서 죽으라고 보내진 병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병졸이 아니라 우리 동포였다.
누가 우리 동포에게 중공군복을 입혀서 우리 민족을 공격하게 하였는가. 바로 노무현이 가장 존경한다던 모택동이 아니던가? 그리고 누가 우리 동포로 우리 민족을 치도록 모택동에게 요구하였던가. 바로 한국의 주사파들이 수령으로 숭배하는 김일성이 아니던가. 간사한 모택동은 중국인이 아니라, 만주족을 개죽음시키기 위해 파병하였으며, 만주족은 만주인을 괴롭히던 마적단원이었던 김일성과 같은 만주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김일성을 지원하는 군대가 되었다.
만주족 언어는 몽고어, 돌궐(투르크)어와 더불어 한국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이며, 본래 중국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족이요, 먼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과 사촌간이라 할 수 있는 우리 동포였다. 그리고, 모택동이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자원병이라 중국 정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을 때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악한 모택동은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의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였던 만주족을 한국전에 파병시켰던 것이다.
한국땅에 발을 내려놓자마자 중공군과 일전을 치룬 터어키 용사들은 지휘관이 자기 발뒷금치에 모자를 내려놓고 전투를 치루었다. 그리고 터어키 용사들은 지휘관의 발뒷금치의 모자가 한발자국도 후퇴하지 않고 모두 장열하게 전사하자는 의미를 알았다. 그리고, 터어키 용사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전사할 때까지 중공군을 막아냈으나 워낙 중공군 수가 많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유엔군의 화력으로도 당해낼 수 없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보며 미군 지휘관들은 무엇을 느꼈었을까?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래 일본군은 먼저 상해를 맹공격하였었고, 상해에는 외국인촌이 있었기에 중일 전쟁 소식은 금방 전세계로 전해졌다. 저항하는 지역에는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폭탄을 공중 투하하는 일본군의 잔혹성에 세계는 경악하였으며, 전쟁 준비가 안된 국민당 정부군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며 수도 난징이 포화에 시달리는 것을 본 미국은 아직 참전은 안하되 군수산업을 가동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남아 제3국을 통하여 군수품을 중국 군대에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모택동이 항일 인민군 모병을 전국적으로 하였는데, 일본군의 잔인성에 분노한 중국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때 미국은 이들이 공산군임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일본군 무기보다도 우월한 신무기들과 병참을 지원하여 주었다. 그래서 중일 전쟁 때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군대는 쪼그라들고, 모택동의 인민군은 날로 세를 확장하여 나갔다. 미국의 군사지원에 힘입어 모택동의 인민군, 즉 중공군은 항일 군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렇듯, 모택동은 미국의 은혜를 크게 입은 자였다. 중일전쟁 이전에는 초라한 오합지졸 몇명밖에 없었던 중공군이 중일전쟁과 미국의 원조 덕을 톡톡히 보았던 것이었다. 그런 모택동이 과거 자기네 군대를 원조해준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일명 백만 대군(실제로 수십 만명)이 압록강을 건너 미군을 치게 하였다. 사실에 있어, 그 지휘관들은 과거에 미국의 병참 원조를 받았던 중공군들이었으나, 실제 인해전술에 동원되었던 병력은 만주족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한족 군벌이 만주족을 지배하였으며, 사업을 크게 하여 경제권까지 장악하려 하였기에 만주족은 한족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으며, 특히 한족 군벌이 일본에 개발권이 있었던 철도 사업에까지 손을 댔으므로 만주군벌과 관동군 사이에 어떤 폭발 사고를 구실로 일어난 어떤 군사적 충돌이 1931년의 만주사변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을 건국한 것은 그의 신민들의 뜻이었음에도 아시아 역사에 무식한 서구인들에 의해 그의 정부가 일본의 괴뢰 정부로 잘못 전해졌다.
서구에 이렇게 잘못 알려진 데에는 국민당의 국제연합 제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민당은 만주는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였으며, 국제 연합은 그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만주인들 편에서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러시아군이 만주국을 침공하여 무력 점령하자마자 국제연합이 영토를 국민당에게 돌려주라 하였으므로 러시아군은 막대한 탈취물을 가지고 3개월만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만주인들은 한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었기에 만주국 국민 저항에 부딪쳐 국민당 군대는 10개월 만에 두 손 들고 철숫하였다.
만주국은 만주족, 조선족, 몽고족, 한족 및 일본인들로 구성된 나라였으며 만주족과 조선족이 공직의 기관장에 오를 수 있었고, 일본인은 조수의 직책 이상 오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청조의 부흥을 부의 황제가 근대화에서 찾으려 하였기에 일본인 전문가들을 각 부처의 조수로 기용하였으며, 이런 통치 방법은 아주 효율적이어서 부의 황제의 치세 하에서 만주국은 다른 나라에서는 수백 년 걸리는 근대 국가 건설을 단 십 수 년만에 이루어낼 수 있었다.
만주국이 관동군 괴뢰정부라는 주장은 상당히 과장되거나 왜곡된 주장이었다. 청조때 러시아군이 남한의 거제도에 해당하는 관동주를 99년 조차받았는데, 노일전쟁 후 그 조차권을 일본이 계승하여 이권 보호를 위해 관동군이 관동주에 주둔하였을 뿐이며, 그 위수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관동군이 한반도 크기 5배의 만주국 행정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으며, 전세계가 전쟁에 시달릴 때도 만주국은 부의 황제의 선정으로 평화를 구가하며 흥왕하였었다.
인구 이백 만명에 비해서 조선족의 고위 공직 진출이 두드러졌으며, 조선족이 나라 살림을 맡아 꾸려가던 만주국은 분명 잠재적 완전 독립국이었다. 국제연합이 포츠담 선언을 참으로 존중하였을진대 나라를 부의 황제와 만주족에게 되돌려 주었어야 마땅하였다. 만주국은 처음부터 경제적으로 완전 독립할 수 있었던 나라였기에 독립국의 모든 요건이 충족된 나라였다. 만주는 중국 역사에서 단 한번도 한족의 땅이었던 적이 없고, 오히려 만주(간도)는 한반도와 우리 민족에 가까움에도 연합국은 국민당 정부 말만 믿고 만주국을 국민당에게 주었었기에, 국민 저항에 부딪쳐 모택동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국민당은 만주를 모택동에게 빼앗겼을 때 중국 본토를 모택동에게 빼앗겨야 했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 성장을 지탱하는 것이 과거 부의황제 치하에서 눈부시게 발전한 만주의 산업이었으며, 그것을 공산당에 빼앗겼을 때 국민당은 약자의 위치가 되었던 것이다. 무력으로 만주족을 지배하려 하였던 국민당과 달리 모택동은 만주족 자치를 허용하였으며, 빨갱이들이 지도자가 된 자치의 위험성을 만주족이 간과하였을 때 그것은 큰 비극이었다. 한국 전쟁 때 그들은 강제 징병되어 중공군 군복을 입고 자기네 사촌 민족을 살육하라는 명을 받고 전쟁터로 내몰려져 허무하게 죽어야 했던 것이다.
만주 인구 중에 조선족이 상당히 많이 있었으므로 한국 전쟁 때 중공군 군복 입고 참전한 중공군 중에는 아마 조선족도 상당히 있었으리라. 오늘날 동북공정은 만주족을 역사 기록에서 삭제하며, 만주족 이웃 사촌 민족을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음모이다. 아시아 역사에 무지한 이들에 의해 잠재적 완전 독립국 만주국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만주족이 중공군 군복 입고 한국전에 참전한 것이 냉전의 시작이었다. 아시아 역사에 무지한 국제사회 때문에 만주족은 사라졌으며, 빨갱이들이 말하는 자주 역시 만주족의 멸절을 초래한 독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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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집과 고향을 버리더라도 공산 치하를 탈출하기 위해 1950년 12월22일 함경남도 흥남에 모인 북한 동포들.
한 명이라도 더 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미군은 몸이 얼어붙는 장진호 위에서 장렬하게 중공군을 막아내었으며, 미군은 전사한 무수한 동료들에게 간단한 묵념만 하고 뒤로 남긴채로 우리 민족을 위해 흥남대철수 작전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