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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사악한 영(靈)의 부체가 세상을 전복
이름 : 한덕희
2006-03-02
9평공산당 중 <제3평> 중국공산당의 폭정 ㅡ http://www.dailychina.co.kr/bbs/zboard.php?id=focus&page=1&sn1=&divpage=1&category=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 ㅡ 에서 발췌했습니다. ............................... 문화대혁명-사악한 영(靈)의 부체가 세상을 전복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이라는 사악한 영(靈)의 부체가 전 중국을 뒤흔든 사건이다. 1966년 중화대지는 또 한 차례 폭정의 세찬 조류에 휩쓸렸다. 적색 테러의 광풍은 마치 미쳐 날뛰는 요괴와 같았으며 고삐 풀린 야생마와도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작가 친무(秦牧)는 일찍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전례 없었던 한 차례 큰 재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고생을 겪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정이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불량배가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서적이 불태워졌고, 얼마나 많은 명승고적이 파괴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선현(先賢)들의 무덤이 파헤쳐졌는가? 또 혁명이라는 허울을 쓰고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는가?” 전문가들의 보수적인 추정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문화대혁명 기간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773만 명에 달한다.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의 폭력과 학살에 대하여 종종 일종의 착각을 하는데, 이 대부분이 모두 반란 운동으로 야기된 무정부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살인자 역시 모두 ‘홍위병’이고 ‘혁명파’들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출판된 수천 권의 현지(縣志)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문화대혁명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홍위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중앙의 각급 정부가 마비되었던 1966년말이 아니며, 혁명파들의 무력투쟁이 가장 성행했던 1967년도 아니다. 오히려 ‘각급 혁명위원회’가 설립되고 마오쩌둥이 국가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회복한 1968년이었다. 전국의 유명한 대학살 중에 무자비한 폭력으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진행한 주범들은 대부분 군인과 무장 민병(民兵), 그리고 각급 당원 및 공산당 핵심 간부들이었다. 다음 몇 가지 예로부터 우리는 폭행이 홍위병 혁명파의 일시적인 과격 행위가 아니라 공산당과 지방 정권이 사전 모의한 정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도자와 각급 권력기구가 폭정에 참여하여 직접 지휘한 이런 사실들은 지금까지 은폐되어 왔다. 1966년 8월 홍위병은 ‘송환’이라는 미명하에 과거 여러 차례 운동 중에서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 우파 등으로 처리되었던 베이징 시민을 강제로 베이징에서 쫓아내 농촌으로 압송했다. 당국의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33,695가구의 베이징 시민들이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고, 85,196명이 도시에서 쫓겨나 원래 호적지로 송환되었다. 이 바람은 아주 빠르게 전국 각 대도시로 퍼져나갔다. 그 결과 40만 명에 달하는 도시 주민들이 송환되어 농촌으로 내려갔다. 지주 출신의 공산당 고급 간부들의 부모조차도 이 대오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이런 송환은 중국 공산당이 문화대혁명 이전에 이미 계획한 것이다. 펑전(彭眞)이 베이징 시장을 맡았을 때, 베이징 시민들의 성분을 ‘유리’나 ‘수정’처럼 순정(純淨)하게 하려면, 즉시 성분이 나쁜 시민들을 모두 베이징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66년 9월 마오쩌둥은 “수도를 보위(保衛)해야 한다”는 지시를 발표하고 예젠잉(葉劍英), 양청우(楊成武)와 셰푸즈(謝富治)를 두목으로 하는 공작조를 설립했다. 이 공작조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공안국(公安局)을 통해 이른바 ‘성분이 좋지 않은’ 시민들을 대규모로 송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로 볼 때 홍위병들이 2%의 베이징 시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송환시킨 사건이 왜 정부의 제지를 받지 않고 오히려 공안국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공안국 국장 셰푸즈는 일찍이 공안 간부 경찰들에게 홍위병을 제지하지 말고 홍위병을 위한 ‘참모’가 돼야 하며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홍위병들은 당국에 의해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 1966년 말에 이르러서는 홍위병들 또한 공산당에 의해 축출되었으며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동(潞)분자’ 로 몰려 감옥에 갔다. 하지만 송환 활동을 주재한 홍위병 조직은 공산당 지도자의 ‘직접적인 관심’ 하에 성립되었고 그들의 훈령 역시 당시 국무원 비서장이 수정한 후에 발표한 것이었다. 수도인 베이징에서 지주와 부농들을 농촌으로 송환한 데 이어, 농촌에서도 지주, 부농들에 대한 박해 운동을 일으켰다. 1968년 8월 26일, 베이징시에 소속되어 있는 다싱(大興)현 공안국 회의에 공안부장 셰푸즈의 연설이 전달되었다. 그 요점 중의 하나는 바로 공안 간부 경찰들은 홍위병의 참모가 되어 검은 5부류(黑五類, 지주, 부농, 반혁명, 불순분자, 우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홍위병들이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즉, 다싱현 학살운동은 현(縣) 공안국이 직접 지령한 것이다. 살인 행동을 조직한 것은 공안국 주임과 당서기였다. 그들은 살인을 함에 있어 어린이들마저 놓아주지 않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민병(民兵)이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이 학살 중에서 ‘표현이 좋아’ 입당까지 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문화대혁명 중 갑자기 입당한 숫자가 광시(廣西)성에서만 9천여 명이 있었는데 이는 살인을 한 후에 입당한 경우였다. 2만여 명은 입당한 후에 살인했으며, 살인에 연루된 사람은 19,000명에 달했다. 광시성 한 곳의 통계만으로도 5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살인 사건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사람을 구타’하는 것도 계급 분석을 해야 했다.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영광이며,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오해이다.” 마오쩌둥의 이 말은 당시 제멋대로 반란운동을 하는 중에 널리 퍼졌다. 계급의 적들에 대한 폭력은 모두 ‘당연하다’고 규정했는데, 폭력뿐 아니라 살육까지도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후난성(湖南省) 다오현(道縣) 인민 무장부 말단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를 도살했다. 66일 동안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가구에서 총 4,519명이 연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차지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였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서 연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아기였다. 이것은 다만 특정지역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네이멍구(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유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시(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이런 사실로 알 수 있듯이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일어난 주요 폭력, 학살사건과 대형사건은 모두 국가기구의 행위였으며 공산당 지도자들의 용인(容認)하에 백성을 박해하고 학살한 것이다. 이런 학살을 직접 지휘하고 집행한 주범들은 대개 군대, 경찰, 무장 민병과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만약 토지개혁이 노동자를 위해 자본가를 타도한 것이고, 반우파 투쟁은 지식인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문화대혁명과 같은 무차별적인 투쟁은 결코 그 어느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설령 공산당이 의지하는 노동자나 농민이라 할지라도 당과 관점이 일치하지 않으면 곧바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바로 공산당 단독으로 천하를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단 국가를 통치할 뿐만 아니라 매 개인의 사상도 통치하였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신(神)으로 만드는’ 운동의 절정이었다. 마오쩌둥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독재하며 한 사람의 이상(理想)을 억 만인들의 머릿속에 스며들도록 해야만 했다. 특이한 것은 문화대혁명 때에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고 도리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가서 해야 하는 것 외에는 무엇이든 할 수 없으며 생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인민들은 마치 종교 숭배처럼 “아침에 교시를 물어보고 저녁에 보고하는”형식을 행해야 했다. 매일 여러 차례 마오쩌둥 주석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으며 아침, 저녁 두 차례 정치 기도를 했다. 글자를 아는 사람들은 자아비평과 사상보고를 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때 사용하는 말도 반드시 마오쩌둥 어록에 근거한 것만 가능했다. 가령 “이기적인 일념에 맞서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거나 “이해해도 집행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역시 집행해야 하며 집행 중 깊이 이해해야 한다” 등이다. 문화대혁명 중에는 오직 하나의 ‘신(神)’만을 숭배해야 했고 오직 하나의 ‘경(經)’만 읽어야 했으니 바로 마오쩌둥 주석의 어록이었다. 어록을 암송하지 못하거나 축원하지 않으면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물건을 사거나 차를 타거나 전화를 걸 때에도 아무 관계가 없는 어록 하나를 외워야 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할 때에 열광적으로 흥분하거나 혹은 감각이 무뎌졌는데, 이미 완전히 공산당이란 사악한 영(靈)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거짓말을 조작하고 거짓말을 받아들이며 거짓말에 의존하는 것은 이미 중국인민의 생활 방식이 되어버렸다. .......................................... >정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GPCR),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 >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혁명정신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이 권좌에 있던 마지막 10년간(1966~76)에 걸쳐 추진한 대격변. > >중국이 소련식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따라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우려 때문에 >마오쩌둥은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노력을 기울여 중국의 여러 도시를 혼란상태로 몰아넣었다. > > >마오쩌둥은 1960년대초 중·소 간의 긴장관계를 겪으면서 >소련의 혁명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음을 확신했으며, >아울러 중국도 그와 같은 길을 따라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 >또 대약진운동으로 야기된 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가고 있던 자기 동료지도자들의 >혁명에 대한 열정이 감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자신의 역할이 축소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 >그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정예주의(精銳主義)가 강한 사회인만큼 >새로운 도시 사회계층이 형성되지 않을까 특히 우려했다. >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위한 다음 4가지 목표를 채택했다. > >① 이미 지명된 그의 후계자들을 자신의 사상에 더욱 충실한 지도자로 대체한다. >② 중국공산당을 정화한다. >③ 중국의 청년들에게 혁명적 경험을 제공한다. >④ 교육·위생·문화 조직을 되도록 정예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    특별한 정책변화를 이룬다. > > >그는 이러한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처음에는 도시 청년들을 대거 동원해 >홍위병(紅衛兵)이라는 집단을 조직했고, > >당과 군대로 하여금 이들의 운동을 막지 못하게 했다. > >또한 측근동료들로 문화혁명을 수행할 >중공중앙문혁소조(中共中央文革小組)를 조직했다. > >그의 아내 장칭[江淸]은 문화계를 지배할 급진적인 지식인 집단을 동원했다. > >국방장관 린뱌오[林彪]는 >군부가 마오쩌둥 사상의 신봉자가 되도록 했다. > >마오쩌둥의 오랜 조력자였던 >천보다[陳伯達]는 캉성[康生]·왕둥싱[汪東興] 등 >보안 관계자들과 함께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와 공안(公安)에 관한 지시를 수행했다. > >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엄청난 혼란의 와중에서도 국무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중 이들 조력자들 사이에 대립이 존재했으며, >문화혁명의 역사는 마오쩌둥의 독창성 못지 않게 이러한 대립들을 그대로 드러냈다. > > >마오쩌둥은 1966년 8월에 개최된 >제8회 제1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十一中全會)에서 >공식적으로 문화혁명을 개시했다. > >학교를 폐쇄하고, >홍위병에게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게 했으며, > >당의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혁명성을 점검했다. > >마오쩌둥은 이 조치가 >젊은 세대와 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당 기관요원에게 모두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운동은 신속히 확대되었다. > >수많은 노인들과 지식인들은 >말로만의 공격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학대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 >홍위병 내부에서는 내분이 발생해 파벌이 형성되었다. > >각 파벌은 자신들이 마오쩌둥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 >운동을 고무시키기 위해 권장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는 >종교적인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 >이러한 운동으로 초래된 무정부 상태와 테러, >사회적인 마비현상은 도시경제를 와해시켜 >1968년의 산업생산량은 1966년에 비해 12%나 하락했다. > > >홍위병 활동 초기단계에 >마오쩌둥의 공식적인 후계자였던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 등 >중요한 정치국 지도자들이 권좌에서 제거되었다. > >1967년 1월에 >성(省) 당위원회를 실질적으로 타도하기 위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 >성 당위원회를 대신할 새로운 정치기구를 창출하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었다. > >1967년 2월에는 >당의 권력핵심에 남아 있던 많은 당지도자들이 문화혁명의 중단을 촉구했다. > >그러나 마오쩌둥과 그의 급진파 추종자들이 >우세했으므로 운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 >사실 1967년 여름경에는 무질서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홍위병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전국 도시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 >1967년 홍위병 내부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자 >마오쩌둥은 린뱌오 휘하의 군대에게 홍위병 대신 >문화혁명에 개입할 것을 지시했다. > >홍위병으로부터 통일된 지지를 얻어내는 방법 대신에 취해진 >이러한 정치·군사적 조치는 군부 내에 더욱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다. > >잠재해 있던 군부 내의 긴장은 >1967년 여름에 우한 군구[武漢軍區] 사령원(司令員)이었던 >천짜이다오[陳再道]가 급진적인 당 지도자 두 사람을 체포하면서 표면화되었다. > > >1968년 나라 전체가 급진주의와 >비교적 온건한 경향의 반복적 엇갈림을 경험한 후, >마오쩌둥은 더 많은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 > >군 장병들이 파견되어 학교·공장·정부기관 등을 접수했다. >동시에 군대는 수백만 명의 도시 홍위병을 >깊숙한 산골로 쫓아보내 그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도시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했다. > >이러한 조처는 홍위병이 분파주의적인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데 대한 마오쩌둥의 환멸을 반영했다. > >혼란을 종결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1968년 8월 중국 내 안보상의 불안감을 증대시킨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 >2개월 후 제8회 12중전회가 개최되어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당기구를 재건하기로 했다. >이 시점부터 문화혁명이 수그러들었고, >그에 따라 권력을 누가 계승할 것의 문제가 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 > >1969년 4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회의(九全代會)에서 >국방장관 린뱌오가 공식적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 >사회 전반에 걸친 군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 >군부 인물들이 당 중앙위원회와 개조된 공산당을 지배했다. >린뱌오는 1969년 봄에 발생한 >중·소 국경분쟁을 이용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아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후계구도에 대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 >1966~68년에 숙청된 몇몇 지도자들은 >1969년 계엄체제하에서 사망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 기간에 심한 박해를 받았다. > >그러나 린뱌오는 곧 반대에 부딪혔다. >마오쩌둥은 너무 성급하게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린뱌오에게 경계심을 품고 그를 제거할 책략을 쓰기 시작했다. > >주석 저우언라이도 마오쩌둥의 이러한 노력을 지원했고,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도 지원했던 것 같다. > >그러나 마오쩌둥의 조력자인 천보다는 린뱌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 >그리하여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정상화시키기 위해 >1970~71년에 많은 조치가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점증하는 심각한 긴장으로 인해 최상위 지도층이 분열되고 있었다. > >이러한 긴장이 처음으로 표면화된 것은 >1970년 여름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에서였다. > >이 회의 후 마오쩌둥은 린뱌오에 대한 경고의 일환으로 >천보다를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 >천보다는 1970년 8월에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 >1971년 9월 린뱌오가 죽으면서 사태는 절정에 달했다. > >중국 정부는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소련으로 탈출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린뱌오가 죽은 지 몇 주 만에 고위 군사령관들이 모두 숙청되었다. > > >린뱌오의 죽음은 문화혁명 기간에 >마오쩌둥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환멸감을 느끼게 했다. >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추진한 최고위급 인물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린뱌오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린뱌오를 후계자의 지위에 올려놓기 위해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해왔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이를 위해 존경받던 스승들을 공격하고 고문했으며, >나이 많은 시민들에게 잔혹하게 굴고 원로 혁명가들에게 모욕을 가했다. > >그리고 이전의 친구들과 유혈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린뱌오가 암살을 계획했다가 탈출했다는 추악한 사실이 상세히 알려지자 >문화혁명이 파렴치한 전형적인 권력투쟁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 >그리고 많은 중국인들이 >자기들은 그저 개인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교묘히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린뱌오의 사망으로 처음에는 저우언라이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 >그는 1971년 후반부터 1973년 중반까지 >중국을 다시 안정된 상태로 되돌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 >교육제도의 부활을 장려했고 쫓겨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복귀시켰다. >중국의 무역이 다시 증가하고 외부세계와의 관계가 다시 증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 착수했던 경제의 전진이 계속되었다. >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 이러한 총체적인 움직임에는 동의했지만, >이러한 움직임들로 인해 처음 문화혁명을 시작할 당시에 추구했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 >그러나 1972년 내내 마오쩌둥은 심한 뇌일혈로 고생했고, >저우언라이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상황은 후계자 문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부각시켰다. > > >1973년초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권력에 복귀시켰다. >저우언라이는 그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추천하고자 했다. > >그러나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기간에 >급진파의 손에 숙청된 인물들 가운데 2번째로 고위직에 있던 희생자였다. > >그가 다시 등장함으로써 >장칭과 그의 추종자들은 필사적으로 더욱 급진적인 노선을 확립하려고 했다. > >1973년 중반부터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장칭을 비롯한 그녀의 지지자들 >(장칭과 함께 훗날 4인방으로 불리게 된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과 >저우언라이·덩샤오핑 집단 사이에서 중국의 정치권력이 왔다갔다했다. > >전자는 이데올로기, 정치 동원, 계급투쟁, 반(反)지성주의, >평등주의, 배외주의(排外主義)를 선호한 반면 > >후자는 경제성장, 교육개혁, 실용주의적 외교정책을 진척시켰다. > >마오쩌둥은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양자를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하려 애썼으나 실패했다. > >1973년 중반부터 1974년 중반까지는 급진주의자들이 상승했다. >그들은 저우언라이와 그의 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을 전개했다. > > >그러나 1974년 7월이 되면서 >경제침체와 점증하는 혼란으로 인해 >마오쩌둥은 다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지지했다. >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악화됨에 따라 >1974년 여름부터 1975년 늦가을까지 덩샤오핑의 권력이 더욱 커졌다. > >1975년 늦가을에 급진파는 덩샤오핑의 정책으로 인해 >결국은 문화혁명과 마오쩌둥 자신이 거부당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마오쩌둥에게 심어주었다. > >그러자 마오쩌둥은 대자보를 통해 이들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도록 재가했다. > >대자보는 그후 급진파가 즐겨 이용하는 선전매체가 되었다. >1976년 1월에 저우언라이가 죽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승인하에 4월에 공식적으로 숙청되었다. >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고 >그해 10월에 행정·경찰·군부 지도자들의 연합에 의해 >4인방이 숙청되면서 1977년에 비로소 덩샤오핑이 복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 >문화대혁명은 >비록 농촌에 살던 수많은 인민들을 비켜가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정책이 끊임없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더욱 늦어지고 >상품과 용역을 분배하는 정부의 행정력이 저하되었다. > >정부의 각급관리들은 정책이 변하면 >그전의 정책을 열심히 추진했던 사람들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결과 관료주의적인 소심성이 만연하게 되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죽음과 >문화혁명의 종결(문화혁명은 공식적으로 1977년 8월에 개최된 >11전대회에서 종결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죽음과 1976년 가을 4인방의 숙청과 함께 끝남) >과 함께 300만 명에 가까운 당원들과 >억울하게 숙청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복권되기를 기다렸다. > >이러한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에 과감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 >그러나 문화혁명의 후유증은 계속 중국의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심각한 세대간의 갈등이라는 문제가 있다. >10대와 20대 초반에 문화혁명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불만이 있으면 거리로 뛰쳐나가는 법을 배웠다. > >급진적인 혁명의 열정 대신에 >교육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문화혁명 이후의 정책하에서는 >이들 수백만의 사람들이 생산적인 일거리를 차지할 여지가 없었다. > >사실 교육제도 자체의 모든 면에서 입은 손상이 복구되려면 몇 십 년은 걸릴 것이다. > >또다른 심각한 문제는 당과 정부 내부의 부패였다. > >문화혁명으로 공포와 상품의 부족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금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사적인 인간관계와 뇌물, >기타 다른 형태의 방식에 의지해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바를 추구하게 되었다. > >그와 아울러 수백만의 도시 주민들이 >1970년대 중반까지 정치적 노선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명백한 권력놀음을 목격함에 따라, >문화혁명은 당 지도부와 당 체제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환멸감을 초래했다. >마오쩌둥이 죽은 뒤 문화혁명의 목적과 결과가 모두 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다. > > >인민들 속에도 심각한 파벌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서로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그런 일은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 >아마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체제에 가해졌던 폐해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마오쩌둥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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