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탈북인이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실감있게 들려주었습니다.
아 래
북한은 단 한번도 해방된 적 없습니다. 일제에서 벗어나자 더 혹독한 독재가 연속돼 왔습니다. 저는 남한 사람들도 북한식으로 사는 줄 알았다가 중국에 와서야 남한이 천국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중국의 조선족들에는 남한이 천국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에는 반일감정이 없습니다. 차라리 해방이 안 되었더라면 지금 일본의 반 정도라도 잘 살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들 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중국을 미워하지 일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미운 것은 책에만 표시돼 있습니다.
1984년 카터가 북한에 왔을 때, 북한 사람들 고생 많이 했습니다. 카터가 지나는 길마다 주민이 동원되어 하루 종일 즐겁게 노는 모습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백화점에 가서는 하루 종일 손님 행세를 연기하면서 하루 종일 돌고 또 돌았습니다.
이건 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원형 놀이기구에 의자를 달아놓은 거 있지 않습니까? 그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은 하루 종일 내려오지 못하고 그걸 탔습니다. 내려올 수없기 때문에 요강을 가지고 올라가고, 비닐봉지에 대변을 보아야 했습니다. 요강이 넘쳐서 소변을 참다가 우리 모친은 방광염이 걸렸댔습니다.
남한에서 대표단이 와도 이런 게임에 동원됩니다. 대표단이 오면 본체만체 하고 당당하게 갈 길을 가라고 지시하고, 선수팀이 오면 열렬히 환영하라고 지시합니다. 남한의 정치인, 관리들이 오면 북한 주민은 카터 때처럼 죽어납니다.
김일성이 1994년7월8일에 죽지 않았습니까? 3년상일 치렀는데 3년 내내 주민이 울어야 했습니다. 수령님을 너무 존경하고 사모한 나머지 이렇게 애통해 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원들이 누가 얼마나 우는가를 조사하고 다녔습니다. 많이 울면 충성심도 높은 것으로 간주됐습니다.
모두가 검은 상복을 입으라 했습니다. 검은 상복을 어디서 만듭니까? 겨울에 입는 옷이 모두 검정색이라 주민들은 검은 옷을 입고 여름 복날에도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그래서 땀띠와 피부병이 유행했었지요. 울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열사증을 받았지요.
한 2년 울었는데 그 때에는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울기만 하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방향을 돌렸습니다. “크나 큰 손실과 슬픔을 혁명적 열정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명랑하게 웃고 오래하고 춤추며 일하라”
주민의 애국심을 찍으러 일본 NHK가 찍으러 온다했습니다. 만수대 동산에 24시간 조문행렬이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누구누구는 몇 시에 나와라는 식으로 당번이 정해졌습니다. 저는 새벽 3시에 눈을 부비며 나갔습니다. 당간부들이 일일히 깨우러 왔습니다.
제일 싫은 것은 남한에서 오는 목사들입니다. 목사들이 왜 종교를 부정하는 북한에 옵니까? 그들이 북한에 오는 건 세계 사람들에게 김정일 체제가 종교를 허용하는 국가라는 걸 선전해주는 선전매체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에 오는 목사들은 무언가 약점( 근본적인 좌익, 돈 또는 기타 약점)이 잡혀 있는 사람들이고 봅니다.
김일성이 늘 말했습니다. “내가 박정희에게 속았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1972년7월4일,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을 공식 천명하면서 통일의 원칙에 합의했다.
*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당시 북한은 대량의 무장간첩을 내려 보내 사회가 참으로 혼란했던 시기였습니다. 닉슨 닥트린이 선포되어 주한미군 철수가 거론 되었습니다. 이 때 박정희는 주도적으로 북한에 밀사를 보내 위와 같은 내용의 화해를 함으로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시간을 벌어놓은 박정희는 오직 경제발전에 피치를 올렸고, 김일성은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후 몇년 사이에 남한 경제가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사게 되자 김일성은 자신의 무력증강 노선과 박정희의 경제발전 노선을 비교하면서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내가 박정희에 속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