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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한글전용이 빨갱이가 아니라고 할수있을까
이름 : 韓國知識人
2006-05-19
 

베트남의 말글 정책

변 광수

한국 외국어대 교수

지난해 12월 19∼20일 이틀 동안 베트남-한국 친선 학술 대회가 하노이(Hanoi) 대학에서 개최되었다. 한국 측에서는 6명의 교수가 참가하여 한국 외국어대 조 재현 교수의 양국간의 관계 발전과 전망에 대한 기조 연설을 시작으로 한국의 역사(박 성래), 언어(변 광수), 정치(신 정현), 경제(이 명호), 언론(조 종혁) 등 분야별 발표가 있었다. 글쓴이는 이 대회에서 우리말 구조의 특성을 소개하였다. 한편 베트남 측에서는 30여 명의 많은 교수와 연구원이 논문 발표를 신청해 온 관계로 이틀간의 짧은 일정에 이들을 모두 수용하느라 주최 측의 어려움이 많았다. 이 대회를 통하여 글쓴이는 두 가지 점에서 깊은 인상과 감명을 받았는데, 그 하나는 베트남 학계의 폭 넓은 한국학 연구 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트남 사람들의 문자 생활이었다.

우선 베트남 측 학자들의 발표 논문은 거의 다 한국의 언어, 역사, 문학, 민속 등 전통 문화와 관련된 비교 연구가 많았고, 최근의 주제로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연구도 있어 매우 다양하였다. 놀랍게도〈춘향전〉에 관한 연구 논문이 세 편이나 되어 우리 측 참가자들의 눈길을 끌었으며, Dang Thanh Le 여교수는 자기가 지도 번역한《(베트남어판) 춘향전》을 우리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월남 전쟁과 이념 문제를 둘러싼 지난 30년 간의 양국의 불편했던 관계와 한국의 근시안적 베트남 연구 자세 등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의 순수하고 장기적인 학문 연구 태도는 우리가 크게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궁금했던 것은, 이렇게 다방면에 걸친 한국학 연구의 방법과 자료 수집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하는 것이어서, 이 문제를 하노이 대학 총장이 초대한 저녁 식탁에서 물어 보았다. 답변에 나선 인문대 학장은 베트남 학자들이 한국어를 먼저 배운 다음 한국에서 나온 자료를 직접 연구에 활용해야 마땅하나 실제는 그렇지 못하여 주로 영어, 프랑스어, 한문으로 쓰인 한국 관계 자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2의 언어를 사용해서라도 우리 나라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힘들여 수행한 그들의 학구열에 감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 글쓴이의 관심을 한층 더 끈 것은 베트남의 말글 정책이었다. 베트남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기원 전 2세기 말에 전한(前漢)에게 정복 당한 이래 1,000년 동안이나 고대, 중세 중국의 제왕조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지배를 받아 왔다. 11세기 이후에는 한자음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여 오늘날 한자어가 베트남어 어휘의 60퍼센트나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트남어는 또한 고립어적, 단음절어적 특성과 함께 6개의 성조를 가진 점이 중국어와 매우 유사하다. 아주 옛날에 베트남인들은 자기 말을 글자로 표기하기 위하여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베트남어의 음과 뜻을 표현해 보기도 하고, 한자의 글자꼴을 바꾸어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3세기 이후에는 한자 자형을 변경한 쯔놈(chũ'nôm; 字喃) 문자가 실용화되어 불교 승려나 한학자들이 시가를 지어 읊는 데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 쯔놈 문자는 그 출현 목적과 방식이 신라 시대의 이두나 향찰에 대비될 만하다고 하겠는데, 이 쯔놈과 한자의 혼용이 그 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고 한다. 17세기 초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와 포교 활동을 벌이던 중 한자의 난해함에 부딪혀 베트남의 말소리를 로마자로 표기하려는 노력이 일어나 마침내 알렉산드르 드 로드에 의해서 로마자 표기 체계가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883년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식민 통치 당국은 1907년부터 베트남 국민들의 문자 생활에서 한자를 완전히 제거하고 로마자만을 쓰게 하는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간 결과, 불과 20여 년 만에 로마자는 전국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로마자에 특수 부호를 첨가한 이 자모 체계는 꾹응으(國語)라고 하며 오늘날 베트남의 유일한 문자 체계로 자리잡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이처럼 장구한 세월을 한자의 영향 속에서 살아왔지만 오늘날 거리의 간판이나 상점 이름이 모두 로마 알파벳으로 쓰여 있고 한자라고는 찾아 볼 길이 없었는데, 이로 인한 국민들의 글자 생활에 불편한 점이나 문제가 없는지 또한 궁금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한 질문을 첫날 만찬 석상에서 제기해 보았다. 답변에 나선 사회 인문과학원 원장(장관급) Nguyen Zuy Quy 박사는 한자어에서 유래한 단어가 60퍼센트나 되지만 로마자만을 쓰는 글자 생활에서 국민들은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실 일부 유식한 노년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일상적으로 쓰는 어휘가 반 이상이나 한자어에서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한자의 뜻을 새겨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개별 단어의 뜻과 로마자로 나타내는 발음을 직접 연결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역사에서 한자와 한문의 비중은 매우 커서 도서관의 고전에 속하는 책들은 거의 다 한자로 쓰여 있기에 대학의 중국문학과 출신들이 번역 작업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글쓴이는 우리 한국어에도 한자어가 50퍼센트나 되며 한글이라는 고유한 소리글자를 가지고 있어서 글자 생활이 아주 쉽고 편리하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남한)에서는 아직도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쓰는 이중적 문자 생활을 하고 있으나 북한에서는 한글만을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Nguyen Zuy Quy 박사는 껄껄 웃으며 한자 사용 문제와 관련해서는 베트남과 ‘코레아’는 어찌 그리 닮았느냐고 하면서,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 월남(사이공) 정부에서도 한자와 로마자를 섞어 쓸 것을 주장하고 그렇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나라의 어문 정책과 정치 이념 사이에도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 의아스러웠다.

베트남의 문자가 로마자로 단일화 된 1930년대에 베트남 학계에서는 이른바 필전이라 하여 수구파와 진보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우리 나라의 국‧한문 혼용과 한글 전용 시비 못지 않게 가열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수구파의 논지는 한자를 제거함은 장구한 세월 동안 유교 문화권에서 꽃피워 온 전통 문화와의 단절을 의미하니, 민족 문화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한자 폐지를 극력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진보파에서는 배우고 익히기 쉬운 로마자를 국민의 말글 생활에 도입함으로써 문맹률이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나아가 민족 의식과 자주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고 응수하였다.

베트남의 어문 실태와 우리의 사정을 견주어 보면 우리는 훨씬 더 양호하고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은, 비록 그것이 식민 지배 세력의 강압적 조치에 의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어려운 한자와 미완성의 쯔놈 문자를 버리고 로마자 사용을 법제화함으로써 국민들의 말글 생활을 한층 더 간편하고 신속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이미 15세기에 세종 대왕께서 당대와 후세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한글이 있음에도, 아직도 이것만 가지고는 문자 생활이 제대로 안 되는 양 어려운 한자를 곁들이려는 쓸데없는 노력이 최근 들어 더 강화되는 것 같다. 지구상에 대다수의 나라들이 자기네 글자가 따로 없어서 남의 나라 글자를 빌려다 자기네 말의 음운 구조에 맞추어 쓰려고 이리 고치고 저리 덧붙여 쓰고 있는 마당에, 우리는 조상이 공들여 만들어 준 훌륭한 우리 글자를 좀 더 갈고 닦아서 하나의 빛나는 유산으로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이번 베트남 학술 대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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