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韓)은 삼종(三種)이 있다.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 진한(辰韓) 세째 변한(弁韓)이다. 서쪽으로는 오십사국(五十四國)이 있었고 그 북쪽으로는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하고 있었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열두나라가 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예맥(濊貊)이 접해 있었으며 변한과 진한이 있는 곳에는 진한(辰韓)이 남쪽으로 열두나라를 갖고 있었다. 진한이 가까이 인접한 곳에는 왜(倭)가 붙어 있었으며 이를 모두 합한 나라가 무려 칠십여덟(七十八國)나라가 있었다. 그 중 한나라는 백제(伯濟)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를 갖고 있었고 작은 나라는 수천호였다. 이들은 모두 산간이나 바다 가까이 생활하고 있었다. 둘레는 합하여 사천여리(四千餘里)이고 동서로는 한없는 넓은 바다와 같았다. 이들 모두가 진국(辰國)이다. 하지만 마한(馬韓)은 최대로 크고 힘센 나라로서 종족들은 모두 왕족에 속했다. 진왕(辰王)의 도읍지는 목지국(目支國)이 있던 진왕(盡王)의 삼한(三韓)땅이다. 그 제후국들은 왕(王)의 선친이나 선조들이다. 그 뿌리가 마한(馬韓) 사람이다.
마한(馬韓) 사람들은 아는것도 많았다. 밭갈이와 누에치기, 길삼옷 짜기, 비단을 만드는 부락과 마을이 늘어났다. 각가지 인종 즉 나라 사람들이 얽혀사는 곳에는 성곽이나 문도 없었다. 그 남쪽으로 지경 가까이에 살고 있었던 왜인(倭人)들은 몸에 문신(文身)을 하고 있었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어른이나 늙은이들은 모두 진(秦)나라가 망해 도망온 사람들이다. 도망온 사람들은 심한 노동이나 고역을 많이 치른 사람들이었다.
한(韓)에서 떨어져 나간 마한(馬韓)은 동쪽 경계선 지역에 있었다. 처음에는 나무활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스스로 활의 나라라고 했다. 이들은 도둑때처럼 무리를 지어 다녔다. 다니면서도 술을 마시고 때로는 서로 놀면서 술자을 기울이기도 하여 호탕하게 살았다. 이들은 진(秦)나라 말을 쓰고 다녔으며 이름은 위(爲란 요임금 外家의 성임)라고 하였다.
진(秦)과 한(韓)은 성(城)을 갖고 있었으며 주로 나무로 즉 목책을 한 성(城)이었다. 나무로 집을 지어 살았으며 나주 큰 읍(邑)과 부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거사(渠師)가 있었는데 훌륭한 이름있는 신하였다.(渠師란 스승을 뜻함).
거사는 지혜있고 용맹스러웠다. 그러나 아주 위험한 품성을 갖고 있었다.특히 계집종들을 속옷만 입혀 가두어 죽이는 일이 잦았다. 그리하여 계집종들이 사는 고을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기록은 모든 관명(官名)록에 적혀있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웠다. 오곡을 심는데 알맞았다. 누에와 뽕나무도 심었다. 무명실을 짜서 베를 만들기도 했다. 시집가고 아내를 맞이하는 예법도 행했다.그리하여 이웃나라 사이에 있는 길도 양보하곤했다. 변한과 진한 사람들이 잡탕으로 함께 모여 살면서 성곽을 만들고 의복도 함께 입었다.
그리고 언어도 풍속도 다르지 않았다. 모든사람들이 키는 크고 장대하였다. 뿐만아니라 머리도 길고 의복 또한 청결하고 개끗했다. 그리고 형법(刑法)도 엄중하고 잘 지켰다.
변한과 진한과 가까이 있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왜국(倭國)이었다.이들은 몸에 문신(文身)을 하고 있었다고 후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변한과 진한이 왜(倭)가 가까이 접경지대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왜(倭)는 위(魏)나라가 망한뒤 소수의 사람들이 뭉쳐 왜(倭)라고 했다. 즉 위(魏)라는 위자는 크다는 뜻이라면 왜(倭)라는 글자는 작다는 뜻이다. 위나라가 망한뒤 왜(倭)의 소국(小國)을 세운곳이 진나라 근처이다. 이때의 진국(辰國)은 산서성, 섬서성, 호북성이 주무대였다. 그러므로 위자(魏字)와 왜자(倭字)는 크고 작다는 차이일뿐 위와 왜는 꼭같은 글자이다. 왜(倭)가 일본사람이라는 것은 위(魏)나라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倭)가 이당시 부터 일본에 있었던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엉터리 사학자들이 왜(倭)가 일본에 있는양 하는 것은 식민사학을 조장하는 행위임을 이 기회를 통해 똑똑히 알아두어야겠다. 특히 위(魏)와 왜(倭)가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역사적 오류를 면치 못할 것이므로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