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앞 시위… 삼성, 폭염 속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시위가 없는 곳’이라고 명성(?)을 날리던 삼성 본관 바로 앞에서 26일 대낮에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의 집회 비슷한 모임이 열렸다.
하지만 이 집회 비슷한 모임은 ‘기자회견’의 형식으로 진행돼 삼성 관계자들로서는 뙤약볕 아래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폭염이 쏟아지는 가운데 삼성사람들과 시민단체, 기자들 간의 구분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단지 ‘기자 회견’에서 한마디 할 관계자들만 삼성 본관 앞 계단에 플래카드를 들고 별도 공간을 확보했다.
삼성 관계자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한 사람이 기자회견 장면 사진을 빠짐없이 찍어 놓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낯 익은 얼굴들도 이날은 건물 밖으로 나와 기자회견의 이모저모를 세세하게 지켜봤다.
삼성 본관 주위에는 전경들도 출동해 ‘기자회견’이 ‘시위’로 번질 가능성에 대비하며 경계를 섰다. 경찰 관계자는 “집회는 신고 대상으로 그간 삼성측이 삼성본관 앞을 선점해왔기 때문에 열리지 못했으나 기자회견은 신고가 필요 없다”며 “이 때문인지 삼성본관 앞에서의 기자회견은 최근에도 있었다”고 말했다.
워낙 ‘귀한 공간’에 색다른 사람들이 나타난 게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알아챈 몇몇 시민들은 더위 속에서도 발걸음을 멈추고 ‘기자회견’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자리를 떴다.
먼저 열린 민주노동당의 기자회견에서 이선근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은 “추악한 재벌의 행태가 어제 오늘은 아니지만 요즘 특히 재벌 때문에 살맛이 안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최규엽 민주노동당 최고위원도 “25일 삼성이 발표한 대국민 사과는 인터넷포털 다음의 여론조사 결과 85%의 네티즌들이 대국민 협박문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제대로 사과를 하라고 촉구했다.
최 위원은 “삼성이 진실로 사과하지 않고 진상을 규명하지 않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으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회견은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 20분간 이어졌으나 이 가운데는 민주노동당원들과 취재기자 뿐만 아니라 예민하게 지켜 본 삼성 직원들도 일부 포함됐다.
민주노동당에 이어 전국 222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언론개혁국민행동(상임공동대표 김영호 외, 이하 국민행동)도 같은 자리에서 ‘삼성의 언론자유 말살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민행동은 이날 발표한 기자회견문에서 “언론이라는 민주주의의 버팀목을 썩게 만든 장본인인 재벌과 언론족벌에 대해 가눌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며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를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하라”고 정부와 검찰에 촉구했다.
국민행동은 홍 대사가 X파일의 내용대로 1백억원이 넘는 돈을 조성해 정치권에 전달했다면, 공소시효 10년의 배임 및 횡령죄에 해당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전한 후, “삼성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언론자유와 민주주의가 제대로 숨쉴 수 없음을 인정하고 결단해야 할 것”이라며 노 대통령을 압박했다.
또한, 검찰에 대해서도 “X파일을 통해 제기된 검찰 스스로에 대한 의혹도 철저히 파헤쳐, 법 앞에서는 재벌총수도, 족벌언론사주도, 정치권력과 검찰권력 스스로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확실히 입증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순 언론개혁국민행동 상임공동대표는 “기업이 자신들의 범위를 넘어 언론과 정치권까지 장악하려고 든 점을 우리는 참을 수 없다”며 “이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고 언론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막으려고 해선 안 될 것”이란 말로 삼성을 겨냥했다.
장경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차장은 “삼성이 소유한 언론사의 간부를 통해 정치권에 로비한 일을 어떻게 수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후, “검찰은 삼성의 추악한 불법 로비에 사용된 자금의 원천에서부터 그 실태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게 수사해 엄중히 처벌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삼성 직원들을 향해 “삼성 내부개혁에 적극 나서달라”고 호소했으며, 김상훈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위원장은 “형평성 문제를 거론하며 홍석현 일병구하기에 나선 삼성과 중앙의 모습이 처절하게 느껴진다”고 덧붙였다.
언론개혁국민행동은 이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향후 ‘안기부 X파일’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싸워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신학림 언론노조 위원장을 시작으로 삼성 본관 앞 1인 시위에 들어간 상태다.
신 위원장은 ‘만일 삼성이 안기부 X파일 보도에 나섰던 언론사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소송에 나선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소송을 하면 할수록 국민들에게 삼성의 본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좋다고 본다”며 “삼성이 아무리 많은 법률가를 고용해도 명백한 범법행위에 대해 법이 올바른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경·언 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는 말에 대해선 “아직 구체적인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도 “또다른 사실이 밝혀질 경우 해당 언론사를 상대로 투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한성 최고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