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천안문 사태의 잔인한 무력 진압은 명백히 덩샤오핑(鄧小平)의 책임이다."
(趙紫陽)
"자오쯔양은 동란(動亂) 편이야. 당도 분열시키고"(鄧小平) "CIA 첩자들이 동란을 부추겼어. 인민해방군 동원해 쓸어버립시다."(李鵬)
-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중국 최고지도부 비밀대화록중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당시 정부는 무력동원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우겼지만 자오는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고 말했다. 자오 스스로도 유혈진압을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자오는 철조망이 쳐진 자택에 연금돼 있으면서도 농민, 해고 노동자, 빈부격차 문제 등 주요 현안에 관심이 많았고, 끝까지 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천안문 사태 16주년을 앞두고 전(前) 신화통신 기자 쭝펑밍(宗鳳鳴)의 AFP 통신과 대담
"천안문 시위대를 지지해 숙청된 중국 지도자 사망이라는 헤드라인 기사와 함께 오랜 연금생활 동안 그는 정부가 천안문 사태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믿는 중국인들의 상징이 됐다."(뉴욕타임스)
"중국이 일본처럼 복수정당과 자유로운 선거를 하는 국가가 아니라서 곤란한 문제가 있겠지만 민주화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기 바란다"(일본 고이즈미 총리)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자오 동지'라는 표현을 썼으나 그가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실어 중국 당국에 무언의 비판을 던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1989년 6월 4일은 5·4운동 70주년이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지 꼭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또한 중국사회주의의 정권 수립 40주년이자 등소평의 개혁·개방 실시 10년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조자양의 개혁정책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자 이붕은 정치개혁의 속도를 완만하게 하자는 내용의 건의를 했으며, 원로들은 책임을 물러 당총서기직에서 사퇴시키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 천안문 사태는 中國 '경제 개혁' 딜레마 대충돌
천안문 사건은 민주화 제1세대 지도자로 칭송되던 호요방 전 총서기의 사망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를 신호탄으로 하여 촉발되었다. 그럼에도 호요방의 죽음이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후에 많은 대중으로 확산되는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경의 봄은 당내 일부 개혁파와 당외 소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상과 문호의 개방, 과감한 체제개혁을 표방하는 정치개혁 요구 때문이었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천안문 발생 이전까지 약 10년간, 즉 1978년 등소평 체제가 공식 출범한 이후 중국 경제는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 등소평은 농촌과 도시지역에 구분하지 않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며,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파격적 문호개방정책을 전격 단행함으로써 국내외로 개성 있고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로 인정받았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지 10년이 되어갈 무렵에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반적인 경제적 퇴조와 몰락에도 불구하고 중국식 사회주의가 낳은 놀라운 성과는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다.
중국은 1979년부터 1988년까지 10년간 연평균 GNP 성장률 9.6%의 고도 성장을 기록했으며, 무역 총액은 10년 사이에 약 5배정도 증가하였다. 또한 도시와 농촌에서 일인당 평균 수입이 현저하게 증가되었는데, 농촌의 경우 1980년에서 1989년 사이 순수입 증가율이 215%에 달하였으며 도시노동자의 경우는 65%의 소득 증가를 기록했다.
이처럼 중국 경제의 규모는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중국인민의 생활수준도 대폭 향상되었다. 이러한 외형적 변화 못지 않게 중국 사회와 중국 인민의 의식에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즉, 등소평의 경제 우선주의에 입각한 개혁개방 정책은 결과적으로 중국 사회의 다원화를 촉진한 것이다. 부연하면,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 촉발의 동력원으로 작용하기 이른 것이다.
등소평 리더십의 딜레마는 생산력의 발전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던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생산력의 발전이 오히려 시민운동을 조장하여 정치적인 불안정이 조성되었다는 데 있었다. 경제적 논리로 정치적 문제를 극복하려던 등소평의 중국식 사회주의가 오히려 정치개혁과 경제개혁간 불균형 초래의 최정점을 향해 질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점은 중국 지도부의 실용주의 노선과 관련하여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신권위주의적 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개혁·개방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야기된 위기 요소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이 천안문 사태의 비극을 부른 일대 전주곡이라 할 것이다.
<1989년 4월 호요방 전 총서기의 서거가 촉발>
1986년 12월 대규모 학생 시위로 실각했던 호요방(胡耀邦)이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이를 계기를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각지의 학생들은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며 거세게 일어서게 되는데, 이 운동은 현실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 시민의 지지를 얻어 예상을 넘어서는 규모로 확대되어 천안문광장이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는 학생 시민으로 가득 메워졌다.
4월 22일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수천 명의 군중은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 일정 제시 등 급속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로 돌변했다. 그들의 개혁 요구는 재빠르게 대학생들에게로 옮겨졌으며, 이들은 5월 13일부터 중국 공산당에 반대하는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특히 학생들은 노동자·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5월 13일 이래,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5월 19일, 개혁파에 속했던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공산당 총서기는 학생들에게 투쟁을 중단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중국 공산당 강경파인 이펑(李鵬) 등은 5월 20일,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드디어 6월 4일 유혈 진압이 이루어졌다. 북경의 천안문광장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 시민에 대하여 인민해방군이 출동하여 전차의 돌입과 기관총난사에 의한 무력 진압을 강행함으로서 다수의 사상자를 낳았다. 시내 곳곳에서도 수천명의 시민·학생들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유혈 진압만으로 사태가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은 정치적으로는 안정에 최우선을 두어 학생 및 지식인 등 민주화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 숙청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7만2천여명의 당원이 제명되었고 25만6천여명은 경고 및 징계처분을 받았다.
- 천안문사태 이후 숙청된 공산당원 총 32만 8천명: 중국 민주화 세력의 몰락
경제적으로는 치리정돈(治理整頓)의 일환으로 수요억제, 내핍생활 장려, 산업구조 조정, 가격개혁의 잠정적 중단을 실시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등 경제적 혼란을 진정시키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천안문 사태 '목숨 건 권력투쟁'의 산물>
여기 소개되고 있는 것은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비등점을 행해 치닫고 있을 무렵,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생존을 건 치열한 권력 투쟁을 엿볼 수 있는 의사록이다. 핵심 키를 쥐고 있었던 등소평이 공산당 결국 체제 유지의 고육책으로 무력 진압을 승인하는 가운데 궁지에 몰린 조자양의 처절한 사투가 생생히 그려지고 있다.
<자오쯔양> "내가 북한 방문을 마치고(4월 30일) 돌아왔을 때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4월 15일 胡耀邦전 총서기 사망 후에 계속된 학생시위를 반혁명 동란으로 규정)이 사회의 많은 분야에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시위 학생들의 주요 이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사설에 자극 받아 5월 13일 수백명의 학생들이 단식투쟁을 시작했으며 그들의 주요한 요구 사항 중 하나는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민주화 시위를 동란으로 규정)에 대한 공식입장을 번복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우리는 4월 26일자 사설을 수정해야 한다."
<리펑> "4월 26일자 사설의 핵심 구절은 덩샤오핑 동지의 4월 25일자 발언("이번 시위는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 "이것은 동란이다" "그 진짜 목적은 중국 공산당과 사회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전 당과 국가는 가장 심각한 정치투쟁에 직면해 있다")에서 따온 것이다. 덩샤오핑이 한 말은 바꿀 수 없다.<以上 5월 16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발언록>
<리펑> 나는 쯔양 동지가 학생시위가 고조된 데 대해 주요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상황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책임도 져야 한다. 5월 4일 아시아개발은행(ADB)과의 회동에서 덩샤오핑 동지의 발언과 4월 26일자 사설의 정신을 회피하는 연설을 했다.
첫째, 명백한 동란 상황에서 그는 "중국이 큰 동란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둘째, 동란의 목적이 공산당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사회주의체제를 붕괴시키려는 데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우리의 현 체제를 반대하지는 않으며 다만 그들은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시정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이는 당 중앙의 결정에 명백히 모순되는 것이다.
<덩샤오핑> "쯔양 동지, 5월 4일 당신이 ADB와 만나 한 발언이 전환점이 되었다. 그때 이후 학생 시위는 계속 악화됐다. 물론 우리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서둘러서는 성공적으로 할 수 없다. 우리 10억명의 인민이 갑자기 다당제 선거를 채택하면 문화대혁명때 봤던 전면 내란 같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베이징이 계속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선 베이징의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다른 지역에서 생긴 불안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 철로 점거, 폭행, 파괴와 약탈 등 이런 것들이 동란이 아니면 무엇이 동란이란 말인가. 사태가 계속 이렇게 진행되면 우리는 심지어 가택연금에 처해질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인민해방군(PLA)을 불러들이고 베이징, 정확히 베이징의 시내 지역에 계엄령을 발동하기로 결론 내렸다. 계엄령의 목적은 동란을 한꺼번에 완전히 진압하고 사태를 조기에 정상화하는 데 있다. 이것은 당과 정부의 피할 수 없는 책무다."
<자오쯔양> "결정은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샤오핑 동지, 나로서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어렵다. 나는 곤란하다." <덩샤오핑> "소수는 다수에 굴복해야 한다." <자오쯔양> "당의 규율에 따르겠다." <以上 5월 17일 오전 덩샤오핑 자택에서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발언록>
홍콩 '야저우 주간'(3월22∼28일)에 따르면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총리직에 있던 리펑이 지난해 가을 30만자 분량의 방대한 회고록 '관건 시각'을 출판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중앙에 출판 동의 요청을 했다 한다.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중앙정치국 위원 10명이 리펑의 원고를 회람했으며 출판 보류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고록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고위 지도자들이 각각 어떤 발언을 하고 어떤 조처를 취하도록 했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리펑이 이를 출판하려는 본심은 자신이 중국 안팎에서 1989년 천안문 사태의 유혈진압 책임자로 지목당하고 있는 것에 변론의 성격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당시 유혈 진압에 동분서주했던 지도자들의 행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빛 바랜 사진처럼 퇴색하는 것이 아닌 더욱 선명하게 다가설 것이다. 역사적 책임을 물을 날이 예고 없이 일순간 도래할지 모를 일이다. 더욱이 작금의 시대는 당시와는 판이한 양상이다. 정보와 시대의 도래에 이른 혁명의 물결이 출렁이며 넘실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중국 지도부에게는 식은땀 흐르게 하는 악몽은 단연 '온라인 민주주의' 함성일 것이다.
중국의 네티즌들에게 중국 당국이 금지한 검색어로는 '파룬(法輪)' 등 중국 정부가 불법화한 '파룬궁(法輪功)' 관련 어휘가 약 20%를, 또 '다당제' '일당(一黨)' '자유·민주' 등 정치체제 관련 단어가 약 15%를, '폭정·폭동·공안' 등 사회질서 관련 용어들이 10% 정도를 차지한다. '왕리슝(王力雄)' '장우창(張五常)'등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 이름도 전체 금지어의 약 10%에 이른다.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사태에서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이제 진정한 적수인 인터넷을 만났다. 중국 공산당은 결국 인터넷 전쟁에서 두 손 들고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뉴욕타임스 베이징(北京) 특파원을 지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의 고언에 어찌 한 두 사람만 동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