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지주계급을 제거
건국 겨우 3개월 만에 공산당은
중국 전역에서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전개했다.
그들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구호를 내걸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지주들에 대해 투쟁하도록 했다.
또한 인간성 중의 이기적인 면을 방임하여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도록 고무하고 격려했으며 도덕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동시에 토지개혁 전체 노선 중에서
‘지주계급을 제거’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제시했다.
또 농촌에서 광범위하게 계급을 구별하고 성분을 확정하며
전국적으로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지주[地], 부농[富], 반혁명[反], 나쁜 사람[壞]’이라는 모자를 씌웠다.
그들은 중국 사회에서 멸시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공민(公民)의 권리가 없는 ‘천민(賤民)’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토지개혁이 변경 지구와 소수민족까지 깊이 침투됨에 따라
공산당 조직도 신속히 확대되어,
향(鄕)에는 당 위원회가 있고 촌(村)에는 당 지부가 있는 정도까지 발전했다.
당 지부(支部)는 당의 지령을 하달하는 공산당 최일선 조직으로,
종종 계급투쟁 제1선에 뛰어들어 농민들을 선동하여 지주와 투쟁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약 10만 명에 달하는 지주들이 생명을 잃었다.
더욱이 어떤 지역에서는 지주뿐만 아니라 그 일가족이 몰살당했는데
심지어 부녀자와 어린이들마저도 불행을 면치 못했다.
이 시기에 공산당은 전국 농촌에서
“마오 주석은 인민을 구원한 큰 별[大救星]이며 오로지 공산당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선전을 처음 시작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혜택을 입었으며
또 적지 않은 빈농(貧農)들은 공산당에 대해 감지덕지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인민을 위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로 말하자면,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좋은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토지를 분배한 지 2년도 채 안 되어
공산당은 호조조(互助組), 초급사(初級社), 고급사(高級社),
인민공사(人民公社) 등 일련의 운동을 농민들에게 강요했다.
‘전족(纏足)’을 비판하면서 여론몰이에 나서는가 하면,
해마다 박차를 가해 농민들에게 사회주의에 ‘뛰어들어’ 오도록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양식(粮食), 면화(棉花), 기름을 일괄 구입판매하여
전국의 주요 농업생산품을 시장 밖으로 배척했다.
더욱이 호적제도를 강화하여 농민들이 도시에 들어가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농촌에 호적이 있는 사람은 국가 양곡점에 가도
양식을 사지 못하며 자녀들도 도시에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결국 농민의 자녀는 다시 농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3억 6천만 농민들은 2등 공민으로 전락했다.
1978년 개혁(改革)을 시작한 연대에 와서야
전국은 소강(小康)상태로 접어들었고
일부분의 사람들이 먼저 부(富)를 얻게 된다.
9억의 중국 농민들도 가정 도급제가 인민공사를 대체한
최초 5년 동안에는 수입이 증가하고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개선되는 듯했다.
하지만 농산품과 공산품의 연이은 가격하락과
농촌간부들의 착취 속에서 또 다시 빈곤 속에 빠졌다.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소득격차가 급격히 커지고
빈부 격차가 확대되자 농촌에서는 다시 새로운 지주나 부농이 나타났다.
신화사(新華社)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97년 이후 “주요 양곡 생산지역과 다수의 농가수입이
지속적으로 정체상태에 있으며 심지어 수입이 떨어지고 줄어들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농민의 농업소득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줄어든 것이다.
도시와 농촌 주민의 소득 격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1.8:1이던 것이 지금은 3.1:1 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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