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南侵 주력부대는 朝鮮族 6만5,000명”
현대사 발굴 : 독립투사 김동삼 선생의 후손 ,金中生씨의 증언
박종주 월간중앙 차장 (jjpark@joongang.co.kr)
6·25 한국전쟁의 이면에는 조선족이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6만5,000명의 조선족이 전쟁 전에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주력부대로 재편된 후 南侵을 선도했다. 전쟁 도중 입대한 병력과 중공군 통역으로 참전한 인원까지 치면 모두 10만명의 조선족이 6·25에 참전했다.
조선의용군을 직접 체험하고, 타의에 의해 인민군으로 참전했던 김중생씨의 증언을 통해 조선족의 참전 秘史와 6·25 직전 인민군 최전방 부대의 움직임을 복원해 본다.
金中生
1933년 4월 중국 하얼빈에서 출생
1946년 7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 본부 통신병 근무
1947년 3월 주하현 조선중학 재학
1950년 4월 북한 조선인민군에 편입
1957년 9월 인민군 제대후 온성탄광에서 노동
1958년 3월 중국으로 귀환
1958년 9월 가목사사범대학에서 역사학 전공
1961년 9월 아성현 중국중학교에서 역사교사로 근무
1966년 6월 문화대혁명때 교내 연금 및 강제노동
1970년 3월 농촌으로 추방돼 집단농장에서 노동
1974년 3월 교사 복직
1987년 8월 독립기념관 개관식에 참석
1989년 1월 영주 귀국
1989년 2월 삼성물산 해외사업부 중국담당 고문
1997년 2월 삼성물산 퇴사
선의용군을 지금처럼 역사의 미아(迷兒)로 방치해 놓는다면 제대로 된 6·25 전사(戰史)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일제시대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김동삼(金東三) 선생의 손자로, 지난 1989년 하얼빈에서 영주(永住)귀국해 현재 서울에서 생활하는 김중생(金中生·68)씨는 올해도 이러한 아쉬움 속에서 6·25 51주년을 맞이했다.
‘조선의용군’은 일제시대 때인 1938년 10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결성된 항일무장독립부대였다. 당시 조선의열단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하던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지도부에 한·중(韓中)연합체 성격의 무장부대의 필요성을 건의해 탄생한 것이 조선 의용군이었다.
중국 국민당 산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족 청년 122명을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의용군은, 그러나 출범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갈등을 겪게 된다. 1942년 좌익계열 대원들이 의용대 본부가 있던 중칭(重慶)을 떠나 중국공산당의 영향권 아래 있던 화북(華北)지역으로 이동해 버린 것.
이후 중칭에 남아 있던 김원봉 대장 등 민족주의 계열 대원들은 광복군으로 편입되고, 화북으로 떠난 대원들은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 본격적인 군사편제를 갖추게 된다. ‘조선의용군’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조선의용대’로 불렸다.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 항일투쟁에 나선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무장해제당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일본이 퇴각함으로써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內戰)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하고, 전략 요충지인 만주를 선점하기 위해 의용군을 이용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옌안(延安)과 타이항(太行)산 일대에 주둔했던 조선의용군에 만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만주로 진출한 조선의용군은 현지 조선족을 입대시키며 규모를 사단급으로 키운 뒤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국민당의 지방부대와 싸우게 된다.
항일투쟁을 위해 결성됐다 중국공산당 휘하 부대로 성격이 변해버린 조선의용군이 다시 한번 역사의 회오리 속으로 끌려들어간 계기가 바로 북한으로의 입국과 6·25 참전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만주 진출후 사단 규모로 확대되고 전투경험도 풍부해진 조선의용군을 6·25 이전에 북한으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북한 인민군으로 재편된 조선의용군은 6·25 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 최전방에서 남침(南侵)의 선봉대 역할을 맡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