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은 그 호칭부터 심한 논쟁에 시달린다. '교포', '동포', '한인'(韓人), '중국인'…. 하여간 중국 국적 소유자이자 자칭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200만 '집단'은 그 호칭부터 한참 엇갈리기 시작한다.
과연 '조선족'이란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필자도 200만 조선족 집단 가운데 한사람이지만, 실제 그 호칭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유명사의 하나로 생각한다면 어떨는지. 산을 산이라 하고, 물을 물이라 하듯…
조선족이 집단적으로 중국으로의 이주를 시작한 것은 조선말기의 일이다. 두 차례의 호란(胡亂)과 왜란(倭亂), 계속되는 실정과 부정부패 그리고 자연재해. 상처로 얼룩진 이 땅의 민중들은 발각되면 참수형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위험보다 더 큰 절박함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청(淸)나라 동북부에 있는 금지(禁地)의 터에 씨를 뿌리고 터를 잡았다. 물론 그 먼 옛날 고구려 유민이 이곳에서 벼농사를 했던 일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 중국 동북지방의 열악한 기후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경작을 이끌어내기 시작한 것은 조선말기 이주민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살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목'을 걸고 국경을 넘어야 했던 조선 말 민초들이 중국을 향한 이주 행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국경 넘어 살아남기 경주'는 '이어 달리기'처럼 꾸준히 바통을 이어받는 주자가 줄을 섰고, 일제의 침략 야욕에 조선의 앞날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 때 경기 참여자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국호 개명에 뒤이은 일제 식민지로의 전락.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민초들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입신양명과 자수성가를 꿈꾸며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다수가 있었을 게다.
자발적인 선택이외에 일제의 강제이주정책도 중국 이주 역사에 한 몫을 했다. 한반도의 제 2의 일본화와 병참 기지화를 추구했던 일제는 만주에서 출발해 대륙을 강점하고 아시아를 장악하고자 하는 야욕 실현을 위해 '2등 국민'의 대대적인 만주 이주를 감행했다.
이유가 어떻든 분명, 이 땅의 민초나 의혈(義血)인이 고향을 등지고 이국 타향살이를 마다하지 않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조선의 부패와 무력함에 있었다. 개국과 쇄국의 장단점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땅의 권력자와 정치인이 자국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국을 등지고 척박한 만주 땅에 두 발 디딘 '조선의 선구자'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가끔 '버림받은 민족'이란 자괴감에 빠져들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조선족은 잡초보다 더 한 질긴 생명력으로 한족화의 열풍을 피해 어제를 연명하고 오늘을 살아남았다. 고유의 민족 풍속이 한민족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탯줄이라 생각했던 조선족. 과연 그들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혹자는 조선족이 중국 소재 56개 민족 가운데 대학 입학률이 가장 높은 'NO. 1' 민족이라고 자화자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화려함의 내면에는 곪은 상처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의 뿌리깊은 원한관계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한중 수교 10주년만에, 어찌해서 동지(同志)이자 동포(同胞)였던 '우리'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되었는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패망 후,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韓人) 중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머지는 다양한 이유로 그대로 중국에 남게 되었다. 물론 필자와 같이 중국에서 출생해 '조선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한국에서는 교포 1세, 2세, 3세 등의 호칭으로 구분을 해준다. 그렇게 말하면 필자는 교포 3세이다. 투박한 신분증에 박힌 조선족이라는 단어 외에 또 다른 호칭을 부여받은 셈이다. 원한적도 없고 선택한 적도 없지만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호칭들… 하긴 단군의 후손이지만 중국에 태어났으니 '중화민족'의 일원이기도 하다.
조선족. 중국에서는 중국공민의 일원이자 56개 민족의 하나인 중국조선족의 구성원이다. 이와 동시에 한국에서는 외국인등록증에 100%중국인이 아니라 "CHINA-KOREAN"이라 기록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중국인 행세도 한국인 행세도 모두 할 수 있는 양수겹장인 셈이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보면 완전한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야말로 '버림받은 민족'으로서 조선족이라는 당혹스런 사태가 발생한다.
옛말에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다. 필자는 중국과 한국이 두 마리의 고래이고 조선족은 그 사이에서 등터지는 새우라고 생각한다.
한·중 수교를 전후해 한국의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낮은 인건비와 대륙 시장에 대한 매혹에 이끌려 대거 중국에 진출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문화와 중국언어에 능숙한 조선족의 참여는 또 다른 숙명이었고…. 그러나 이미 한국인과 조선족의 관계는 냉철하고 철저한 자본주의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명 중국진출 한국인에게 조선족은 물과 소금이었고, 조선족은 또 그만큼 순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족이 코리안 드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의 조선족 상대 사기와 범죄가 급증했다. 급기야는 1999년 <재외 동포법> 제정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갈등이 수면 위로 급 부상하게 된 것이다. 결국 세월은 치유가 아닌 상처로 남았고, 그 만큼 양자간에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필요에 따라 남도 되고 님도 될 수 있는 그런 관계…. 전체 재외동포의 40%에 달하는 조선족이 한·중 양국 정부의 이해관계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현명한? 판단에 의해 재외동포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현실….
어떤 이는 조선족이 박쥐 근성을 지녔다고 한다. 하긴 새로 보일 수도 있고 쥐로 보일 수도 있으니 적절한 비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니겠는가. 한국도 필요에 따라 조선족을 동포로 구분하기도 하고 중국인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걸 보면 박쥐와 무관하다고 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국적법은 한국에서 5년 이상 정상 거주한 외국인이 한국국적을 신청할 경우 귀화시험을 거쳐 본래의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 역시 외국인등록증을 소유하고 있으며, 모든 다른 면에서 법적으로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국적법에 '조선족은 적용 예외'이다. 조선족은 법률상 '한국인이 외국인이자, 외국인 아닌 외국인'이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어찌 '버림받은 민족'이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조선족은 '2중 국적자'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출입국 관리사무소 국적과 직원의 말, "중국정부 눈치 때문에…". 차라리 솔직하게 가난한 중국 동포의 대량 유입이 두렵다고 했으면, 가슴이 그렇게 저리지는 않았을 텐데.
조선족의 '찬밥 신세'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민족정책, 즉 소수민족우대정책이라는 모토 하에서 조선어는 유지하되 결국은 중국문화에 순응해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여러 이유로 조선학교(교포학교)들의 사정은 어렵기만 하다. 한국바람에 조선족 사회가 붕괴되어가고 있다. 원망 이전에 가장 큰 책임은 조선족 스스로에게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늘이 조선족을 버리고 있다'는 체념이 끊이질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조선족 사회는 지금 말기 암환자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 몸 구석구석 암세포가 전이된….
[2] 위기의 조선족
교육은 국가의 근본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교육은 민족의 근본이기도 하다. 분명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같은 민족의 나라가 존재한다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200만 조선족은 이제 흥망성쇠를 걱정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설사 200만 조선족 이 모두 중국인이 된다고 해도 민족 그 자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닐진데, 운명의 장난인지 조선족은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조선족은 버려진 민족이다. 이른바 '특수집단'이라고 할까.
조선족은 초기 정착 역사에 있어 다방면에서 참으로 우수한 민족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 반식민지반봉건사회를 연출하다가 몇 년 동안의 내전을 거치면서 궁핍하고 낙후해진 중국에서 더 열악한 환경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타국살이로 몸에 베어버린 특유의 강인한 기질로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초기 거의 모든 면에서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을 능가했던 것이 조선족이었다. 그만큼 중국인에게 조선족은 보다 문명화된, 깨끗하고 강인하며 단결심이 강한 우수한 민족이라는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1949년 10월 건국이래 중국은 대약진이니 문화대혁명이니 하는 가히 '천지개벽'이라고 할만한 중대 사건을 거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8년 11기 3중전회를 전환점으로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며 그야말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낙후되고 더럽고 우매한 족속으로 평가받던 중국의 한족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세계 일류 중화사회' 건설을 위해 총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변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던 중국에서 지난 이 십여 년간 무엇을 했는가? 분명 조선족 사회에서도 발전상을 찾아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조선족 사회는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잠시 전에 언급했듯이, 교육은 민족의 미래이자 근본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족이 '교육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지리적 원인으로 인해 조선족의 주 거주지는 외지고 궁벽한 산촌이 대부분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벼농사를 발전시키고 완강한 생명력으로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면서 살아온 조선족의 발자취는 분명 자긍심을 품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훗날 경제적 뒤 처짐을 겪게되고 이는 결국 후대의 교육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 예전에는 미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족사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연변자치주는 궁벽한 산촌이라 일단 교통이 불편하다. 연변대학이라는 우리 민족의 대학이 생겼을 때 절대 대다수의 조선족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개교 당시부터 일부에서는 연변오지에 민족대학을 세울 것이 아니라 교통이 발전한 큰 도시에 만들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과적으로 개혁개방이래 중국의 많은 대학이 눈부신 발전을 지속했지만, 변두리에 건설된 연변대학은 주위의 몇 개 대학을 통합하는데 그치고 말았으며 많은 인재들이 연변대학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대학의 상황이라면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소학교의 상황은 또 어떠한가? 중국의 개혁개방바람과 한국바람으로 젊은 사람들이 도시와 외국으로 떠났고, 이로 인해 농촌은 황폐화된 노령사회로 전락했다. 조부모에게 위탁된 아이들은 돈벌이를 위해 객지로 나간 부모 덕에 이전보다 나은 금전적 혜택은 누리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가정 교육은 엉망이 되었다.
천진하고 순박한 아이들이 금전만능주의에 물들고 이기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부모들이 타향살이와 타국살이의 설움을 겪으면서 번 돈은 아이들의 손을 거쳐 흥청망청 없어졌으며, 결국 철없는 아이들의 소비풍조는 한족의 잇속만 챙겨주는 꼴이 되었다. 자신들이 당한 설움의 대가랄까. 돈이 좀 있는 보다 부유한 조선족 농촌에서는 농번기 때 한족을 품삯 일꾼으로 고용하는 것은 이미 일상적인 일이다. 중국 땅에서 백년동안 쌓아왔던 조선족의 근면하고 용감했던 기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된 데다 조선족이 사방팔방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조선족 소학교는 학생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을 갖춘 교사를 확보하기도 힘든 형편이다. 이는 분명 중국 조선족 사회의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일환으로 일부에서는 농촌의 몇몇 소학교를 한 학교로 합친 후 원거리의 학생을 각 마을에서 성금을 모아 구입한 봉고차로 등·하교를 시키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이런 방식을 도입하면 적어도 한 학급의 인원이 2, 3명도 안돼는 난감한 상황은 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교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등·하교에 소비되는 오랜 시간으로 인해 아이들의 학업집중도가 떨어지고, 교우간의 어울림과 놀이 시간이 부족한 상황을 초래한다.
소학교가 그렇다면 중·고등학교의 상황은 또 어떠한가? 조선족 사회의 현실을 보면 농촌에는 중학교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적어도 현급 이상 도시에 가야 중·고등학교를 볼 수 잇는데, 학생의 대다수는 물론 농촌학생이다. 이는 학교당국의 경제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 나라에서 주는 돈이 현저하게 부족한 학교에서 학부형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한족 학교는 학부형들 대부분이 시내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터라 각 직장에서 각종 명의로 학교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조선족 중·고등학교는 학부형들의 금전적 지원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돈이 없으니 자연 교직원에 대한 복리수준도 낮고 학교 시설도 한족학교에 뒤 처진다. 당연히 조선족 학교 선생님들의 사기도 한족학교보다 떨어지게 되고 낙후한 학교 시설에서 공부한 아이들도 자연 한족학생들보다 세상을 접하는 시야가 좁게 된다.
소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이렇게 차츰 한족학생에게 뒤 처지기 시작하고, 국가와 민족의 근본인 교육 기반이 흔들리면서 어쩔 수 없이 민족차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중국에는 한족을 제외하고 55개 소수민족이 있는데 조선족만큼 민족학교를 고집하는 민족은 보기 힘들다. 차라리 철저하게 한족에게 동화되어 중국인이 되었더라면, 소학교서부터 민족학교를 고집하지 않고 한족 학교를 다녔더라면, 이런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한족과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조선족 사회는 인재배출의 공백기를 맞이하고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들처럼 조선족 사회 내부에서만 '위대한 민족' 작가, 시인, 기업가…등등을 이야기할 뿐, 과연 중국 전체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재목이 얼마나 있는가?
알량한 민족적 자부심이랄까, 긍지라 할까. 굳이 조선말(한국어)과 조선학교를 고집하고 조선족끼리의 통혼에 집착하며 그 "위대한 배달민족"의 "미풍양속"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온 지난날과 달리, 척박한 중국 땅에 이주하여 온갖 고생을 해온 조상들에게 먹칠을 하게 된 오늘 조선족 모두는 깊은 반성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200만 조선족들의 진정한 출로인지를 정말로 심사숙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지난 겨울방학 때 중국 고향에 체류하고 있던 필자는 용정시(龍井市)가 중국 8대 빈곤도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접한 후 계속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용정이 어떤 곳인가? 재 중국 조선인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땅이 아닌가.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들이 이 곳에서 독립의 결심을 다졌는가? "민족의 요람"이라고 불릴 만큼 중요한 곳이지만 중국의 그 많은 산간벽지들을 제치고 '영예롭게'도 중국의 8대 빈곤도시에 선정된 것이 바로 작금의 상황이다.
'교육 위기'와 '사상 혼란' 그리고 '경제 문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는 지금, '위기'에 무감각한 조선족과 200만 조선족 사회의 붕괴를 방관하고 있는 이 민족의 두 나라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정책은 분명 역사의 흐름을 거역하고 있는 것일 게다.
[3] 조선족의 아픔
조선족은 참으로 많은 아픔을 지고 태어난 듯 하다. '한(恨) 민족'만으로도 모자라 여기에 한술 더 보태 단군님의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단군님의 후손이 되었으니 그 한이 더더욱 많을 수밖에...
지난 4월 26일과 27일 한국과 중국의 축구 경기를 관전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여 년의 한국생활 동안 조선족에 대한 이 땅의 시선을 피부로 접하면서 실감했던 많은 서러움과 반감만큼, 마음 깊은 한 구석에 이 땅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보듬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이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애증(愛憎)의 조국'...
27일 한중 축구평가전 때 문학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관람했다. 물론 중국 응원단에 섞여 중국국기를 흔들며 중국을 응원했지만,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 외침에 동참하고 싶었고, 한국팀의 승리를 희망했다. 그러나 중국 응원석에 갇힌 육신과 '붉은 악마'가 된 영혼의 이중성은 결국 현실적인 타협안으로 무승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귀결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경기가 있을 때면 한국인들은 항상 조선족에게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를 질문한다. 아마 10년 전이었다면 대다수의 조선족이 주저 없이 '한국'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고... 조선족들이 모국이라고 여기고 사랑했던 한국은 결코 조선족을 품어주지 않았으며 '법치국가'라는 명분과 알량한 법을 제정해 이방인으로 만들었고, 막상 조선족에게 혜택이 돌아갈 만한 법이 입안되자 법 조항이 아닌 '내부 규정'으로 조선족을 제외하고 말았다.
조선족은 결국 한국이 조국도 모국도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중국 국민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어설픈 중국인이자 그들에게 익숙한 이방인 같은 존재와 다름 아니다.
그러니 중국을 응원하는 조선족의 쓰라린 아픔을 그 뉘라서 이해할 수 있을까? 월드컵 개최국 한국,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고 세계를 향해 환영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이 나라가 유독 조선족에게만은 징그러운 곳이 되고 있는 현실... 그 슬픔을 그 어떤 한국인이 이해해줄까?
그러나 운명적으로 조선족은 중국과 한국을 다함께 사랑하도록 되어있다.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조선족들의 마음은 더욱 아프고 한번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사연에 의해 친부모를 떠나 양부모에 의해 양육되었다면, 그 불우한 운명의 누군가에게 친부모와 양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일은 분명 바른 일이 아니다. 차라리 출가한 딸에게 친정과 시집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도록 강요하는 게 더 점잖은 일일 게다.
200만 조선족동포들이여,,, 우리 함께 진하게 뭉쳐 한국인이 한강의 기적을 낳았듯이 우리도 더 큰 기적을 만들어 한국이 먼저 우리를 껴안자고 덤벼들 수 있도록, 옛날 전국시기에 월천이 쓸개를 빨면서 비장한 결심을 내리던 그러한 각오로 200만 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자.
위기에 빠진 조선족의 교육문제를 어서 바로잡고, 한국서도 중국서도 이방인이 된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할 것이다.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들을 버리고 자아를 되찾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버림받은 민족이란 멍에를 벗어 던지고 인정받고 환영받는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내노라 하는 인재도 배양하고 우수한 두뇌로 우리의 세상을 만들자.
더 이상 자신의 국적과 민족의 선택 문제로 고심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다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의 주인공일지라도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 자연의 조화요 공평함일 것이다. 겪은 아픔만큼 각성한다면 분명 내일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현재의 중국과 한국의 현실세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인식하여 불우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 '덕'으로 두 나라 문화를 이해할 수 있고 두 나라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자연의 '혜택'을 고맙게 받아들여 위기에 빠진 우리 민족의 사회를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아래에 필자에게 충격을 주었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 시의 작가인 이명철은 한국에서 많은 좋지 않은 일들을 당한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한
한이 높게 높게 쌓여 쌓여
한라산이 되었구나
한이 넘쳐 넘쳐 흘러 흘러
한강이라 불렀구나
한만이 이 땅 이 땅에 맺혀 맺혀
한국이 되었구나
한만이 쌓이고 쌓인 사람들이라
한인이 모자라 대한인 이라 부르는구나
한우도 한만이 남아
한숨만 쉬는구나
한없이 슬픔만 터뜨리며
한없이 울음만 터뜨리며
어둠은 빛으로 가신다는데
우리의 한은 그 무엇으로 풀까
독은 독으로 뺀다는데
가슴에 박힌 독은 그 무엇으로 뺄까
정말로 조선족은 아픔과 한(恨)에 갇혀 신세타령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조선족의 내일은 없다.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할 것이다. 맺힌 한이 있다면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 방도는 중국과 한국도 그 누구도 제시해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제시해주지 않을 것이다. 분명 문제 해결의 원동력은 조선족 내부에 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가 어려움에 처할 때 국민 매 하나에 책임이 있듯이(國家有難 匹夫有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든 구성원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어떠한 아픔도 참고이기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