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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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의 꿈
1952년 8월 17일 대구의 동촌비행장에서 미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이종찬(李鍾贊) 전임 참모총장에게 작달막한 키의 한 대령이 다가와 인사를 하며 한 통의 편지를 건네 주었다. 비행기에서 펼쳐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마당에 이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유린하고 급기야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다. 민의를 무시한 5.26정치파동 등으로 민심은 이미 이 정권을 떠났다. 이 대통령의 비정은 극에 달해 구국의 움직임이 요청되고 있는 시점이라 본다.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소관(小官)들은 각하께서 나라를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을 기대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부당하게 해임을 당하고 이제는 미국으로 雲겨 가시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지난 번에 구국을 위한 행동을 단행할 걸 잘못한 것 같다. 1년 후 귀국하면 다시 지도편달을 받겠다(<참군인 이종찬 장군>, 19쪽)
편지의 내용은 이종찬이 쿠데타를 단행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는 것이었다. 이 당돌한 편지를 건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박정희 대령이었다. 남로당 관련 사건으로 옷을 벗은 그가 어떻게 다시 군에 복귀하여 쿠데타를 감행했었어야 한다고 이같이 말할 수 있게 되었을까?
남로당 사건 이후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의 도움으로 소령으로 복직, 전투 정보과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즉 전쟁이 그를 구원해 준 것이다.
이후 그는 9사단, 육군정보학교 교장을 거쳐 1951년 12월에는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작전교육국장은 이용문(李龍文) 준장으로 이용문과 박정희는 의기가 맞았고 그들의 관계는 여기에서 보다 긴밀해지게 된다. 한편 다시 군복을 입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정희는 육영수(陸英修)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1952년 5월, 정국은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 추진으로 인해 급속히 경색되어갔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국회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이승만은 개헌안을 국회에서 강제적으로 통과시키기 위해 관제 데모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에 이용문과 박정희는 장면(張勉)을 내세우는 쿠데타를 도모했다.
5월 10일 이용문 준장은 장면의 비서실장인 선우종원(鮮于宗源)을 찾아가, 이종찬 참모총장도 알고 있고 밴 플리트(J. Van Fleet) 미8군 사령관도 양해했다며 쿠데타를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는 장면으로 부터 거절당했다. 이런 가운데 정국은 더욱 혼미해졌다. 5월 25일 이승만은 부산을 위시한 전남북 및 경남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부산 지역에 대한 계엄령 실시를 위해 이종찬 참모총장에게 2개 대대의 병력 차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5월 26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이종찬 휘하의 육본 참모회의는 참모총장 훈령 217호를 작성, 각 부대에 내려 보냈다. 그 요지는 군은 개인이나 기관에 예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추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문건의 작성자는 박정희였다 한다. 그러나 훈령 217호에서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던 박정희 자신은 역설적이게도 쿠데타를 의도하고 있었다.
즉 6월 2,3일경 이승만에 대한 쿠데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육본 참모회의가 비밀리에 개최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부산에 2개 대대를 파견하여 2,3백 명에 불과한 원용덕의 계엄군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야당이 우세한 국회에서 이승만을 실각시킬 수 있으리라는 예상에서였다. 회의석상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는 "그 문제는 상부에서 결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다고 결정되면 지장이 없게시리 수배되어 있습니다"라는 답변을 했다. 즉 그는 쿠데타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회의는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방침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으로 결말남으로써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바람은 무산되었다. 한편 유원식(柳原植)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와 그는 당시 언양에 주둔하고 있는 15연대를 동원,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고 과도 정부를 세워 민정에 이양하기로 했고 이를 이종찬 참모총장과 밴 플리트 장군에게 상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찬 참모총장의 우유부단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부산정치파동을 전후하여 이용문과 박정희는 쿠데타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종찬 총장과 그 휘하의 육본측이 이승만의 병력 출동 요구에 반발했을지라도. 이승만에 의한 군의 정치적 이용뿐만 아니라 군의 쿠데타 역시 반대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바람은 무산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승만 제거를 위해 '상비 작전(Operation Everready)'까지 세웠던 미국이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태도를 변화시킨 것도 박정희의 쿠데타 바람을 좌절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여하튼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꿈은 이미 이때에도 그의 심중에 뿌리 박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산정치파동이 지나간 후 참모총장에서 해임된 이종찬은 밴 플리트의 주선으로 미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이종찬이 출발하는 바로 그 비행장에서 박정희는 좌절된 쿠데타가 아쉬워 이종찬에게 그런 편지를 전했던 것이다. 1953년 6월 23일 박정희가 유일하게 존경하고 따랐던, 그리고 같이 쿠데타를 도모했던 이용문 장군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대통령이 된 훗날 박정희는 이용문의 아들인 이건개(李健介) 검사를 돌봐줌으로써 이용문에 대한 그의 마음을 나타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일단의 무장 병력이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 이들은 중앙청,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을 점령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혁명'을 알렸다. 즉 박정희를 실질적 지도자로 하는 5 · 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은 이미 자유당 말기부터 운위되고 있었다. 1959년 9월 미 의회에 제출된 '콜론 보고서'는 이승만 정권의 동요로 인한 불안한 정세를 우려하면서 정당 정치가 실패하면 언젠가 군사 지배가 등장할 것임을 경고했다. 콜론 보고서가 예상한 대로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의 4· 19혁명에 의해 붕괴되었고 뒤이어 등장한 민주당 정권의 불안한 정당 정치 역시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쿠데타를 도모했던 박정희가 다시 쿠데타를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 3.15부정 선거 직전이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결집된 쿠데타 세력은 3.15부정 선거 직후인 5월 8일 쿠데타를 거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4.19혁명이 발생하여 이승만 정권이 붕괴됨으로써 쿠데타 계획은 일단 무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이들은 정군(整軍) 운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5월 2일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는 부정 선거의 책임을 물어 송요찬(宋堯讚) 참모총장의 퇴역을 요구했다. 다른 한편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도 본격적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렇게 시작된 정군 운동은 육사 8기생들의 연판장 작성, 7, 9, 10기들의 하극상 사건 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1961년 2월 김종필, 김형욱(金炯旭), 석정선(石正善) 등이 예편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태 진전 속에서 쿠데타 세력은 1960년 9월 10일 충무로에 있던 일식집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재차 결의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의는 이듬해 5월 16일 쿠데타로 이어졌던 것이다.
박정희는 과거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을 쿠데타에 참여시켰다. 이를테면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 그와 동기생들인 육사 2기생들, 육사 중대장 시절 그가 가르쳤던 육사 5기생들, 그리고 그가 전쟁 말기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형성된 포병 인맥들 등이 그들이다. 여하튼 3천여 명의 소수 병력으로 감행된 5 .16군부 쿠데타는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게 된다.
일제 때 일본 청년장교들의 좌절된 쿠데타 시도인 2 · 26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온 이래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쿠데타의 꿈은 결국 이렇게 실현되었다. 그러나 개인 박정희의 꿈은 실현되었지만, 4.19혁명을 계기로 이제 막 시작된 한국 민주주의의 꿈은 제대로 개화될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채 꺾여 버렸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길고 험한 장정이 또다시 역사 앞에 드리워지게 되었다. 2년간의 군정을 거친 후 대통령에 입후보한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