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통교 신자가 이런 내용을 모르면 안되지....
숨겨진 진실, 피맺힌 죽음
박정희 독재체제의 전반기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시대요, 후반기는 유신치하의 긴급조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후반기에도, 긴급조치로 억누르기엔 무리가 따르거나 반공이데올로기의 '빨갱이' 컴플렉스로 위압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혹은 조작에 대한 의혹을 숨길 수 없어 곤란한 경우에 반공법과 보안법은 여지없이 그 정체를 드러내곤 하였다.
그 시대 국가보안법의 최대 피해자는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박정희 독재권력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두 번씩이나 희생이 되어야만 했다. 특히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특별한 증거나 혐의 없이 여러 생명을 앗아간 엄청난 인권유린의 사건이었다.
1975년 4월 8일 39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상고는 기각되었고 24시간도 채 못되어 8명이 처형되었다. 이 8명은 소위 인혁당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당시 황산덕 장관이 밝힌 인혁당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자.
인혁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건설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간첩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은 그후 거의 지하에 잠복해있는 상태이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동을 강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제2의 사일구로 사회혼란을 조성,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들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인혁당 관련자들을 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갖가지 죄명이 붙여진 채 기소되었다. 인혁당 관련자 21명에 대한 세 번의 재판을 거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 7명에게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고 1975년 4월 9일 위 7명과 학원관계자 여정남 이렇게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렇다면 인혁당 재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공안당국의 발표는 여러가지 면에서 허구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인혁당 관련자들은 5월 2일부터 8일 사이에 대체로 자택에서 검거되었는데 이들은 인혁당 사건의 언론보도를 보고도 피신하지 않았으며, 공안당국이 말하는 '치밀한 조직망'을 통해 대책을 강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인혁당 또는 인혁당 재건이라는 말은 법정에서도 젼혀 나오지 않을 정도였고 피고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보당국이 발표했던 것이며 인혁당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인혁당 간부 또는 인혁당 당원으로 둔갑하였다. 또 이들과 접선했다는 간첩 김상한에 대해서 도예종씨는 "김상한이라는 사람은 본인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며 만난 사실도 없고 우홍선으로부터 일언반구의 이야기도 들은 사실이 없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당국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증거나 단서를 제시하지 못했었다.
박정희 정권이 그처럼 사건을 조작하고 소위 관련자를 사형에 처해야 했던 것은 당시 정권의 취약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2호를 발동하고 연이어 4호를 발동하였다. 그해 8월 15일에는 재일한국인 2세 문세광이 박정희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제적으로도 60년대 이후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고, 대 중국 외교성립 및 닉슨 독트린과 75년 베트남전 패배를 계기로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도 지배적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 리마에서 개최된 당시 비동맹국 외상회의에서는 한국이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가입이 거부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이 국내적으로 가혹한 탄압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특히 인혁당재건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을 반공법,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4호로 완전히 붉은 물로 채색해버리기 위해서 그 배후조종 세력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박정권은 국가전복을 기도하려는 폭력혁명의 실행집단으로서의 민청학련, 해외 공산기지의 지원자로서의 일본인 기자, 전 대통령 윤보선까지를 포괄하는 대야를 배후 조종 지원세력으로 하여 북한과 직접 연관도 갖고 있는 조직으로서 인혁당이라고 하는 거대구조물을 만들어냈다.
인혁당 사건의 재판은 '정찰제 사형판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제대로 심리도 하지 않은 채 8명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사형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처형되었고 시체마저 내어주지 않았다. 특히 30이라는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했던 여정남씨는 정보기관에 의해 가장 잔혹하게 파멸되었던 사람이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이 사람에 대한 집중적인 조작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았고 시체마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화장되었다. 그를 석방시켜주거나 면회를 시켜주면 자신들의 잔학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