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남아 지역에 머물고 있던 탈북자 468명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탈북자 문제가 다시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일부에서는 전체 탈북자 규모가 수십만 명에 이를 거라는 추측까지 내놓고 있다.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사선을 넘어 북한을 탈출하는 주민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북한 내부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탈북자 입국이 완료된 다음날인 지난 7월 29일 기자에게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살고 있는 익명의 제보자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최근 친척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에 다녀왔다. 그 이야기를 메일을 보낸다'며 '현재 북한 주민들은 조선족인 자신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하게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보낸 이메일을 원문 그대로 옮기며 우리말의 어법과 잘 맞지 않는 것만 조금 고치거나 괄호 안에 설명을 넣었다.〈편집자〉
2004년 여름, 부모님께서 북한친척들을 지원하러 북한에 다녀왔다. 그동안 부모님은 북한의 친척들이 보낸 편지를 받으면 중국과 북한의 해관교두(국경검문소)에서 친척들을 만나 지원물자들과 돈을 주고 돌아오곤 했었다.
북한으로 들어간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중국인들이 북한에 들어가는 건 라진선봉과 평양, 개성, 묘향산 등에 국한되며 기타 방식으로도 원산과 남포 이외의 곳은 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교통도 그렇게 통하지 않는다.
온 가족 굶어죽은 친척집
요즘 들어 중국이나 한국의 매체들이 북한의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나 역시 과거 북한에 장기간의 기근이 들어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고, 지금은 살아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남아서 사는 거라고 생각하였다. 허나 이번에 다녀오신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살아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이젠 죽음 앞에 바짝 다가서 있다는 현실을 절실히 느꼈다.
이번에도 부모님은 예전처럼 교두에서 만날 예산(작정)을 하였으나 북한친척들과 연계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중국측 해관 관장이 아버님의 제자되는 사람이고 북한측 해관 관장이 중국측 해관 관장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북한측 해관 관장의 차를 타고 직접 북한의 친척집 앞에 내릴 수 있었다. 해관을 통할 적에 물품검사, 몸수색, 다른 많은 질문들을 거쳐야 한다. 이번에 가져간 물품 중에 '신라면' 한 상자가 있었는데 북측 해관에서 전문 여자 한사람(공관원을 의미하는 듯)이 그 상자에 쓰인 '한국'이라는 글자를 모두 긁어내고 모든 라면봉투의 한국이라는 글을 가위로 오려내고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북한인들은 체면이라는 것이 없다. 다짜고짜 물품 중 자신이 갖고 싶은 건 가지겠다고 하거나 달라고 한다. 북한 해관을 통과하려면 '뢰물'을 먹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모님은 2년 전에도 북한친척을 지원해 주었다. 이번에 가보니 어머님의 첫째 오빠네 집엔 사람이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첫째 외삼촌은 오래 전에 굶어서 세상을 뜨셨고, 외숙모는 1년 전 아들에게 쫓겨나 떠돌아다니다가 셋째 외삼촌네 집에 들러 감자를 한끼 얻어먹고 밖에 나간 후 세상을 떴다고 한다.
북한인들은 부모자식 간에도 돈이나 물건에 대해 서로 믿지 못한다. 장기간의 기아가 인성을 말살해버린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감자와 강냉이를 먹으며 살고 있다. 감자는 비료가 따라가지 못해서 살구보다도 작고 제대로 익지도 않는다.
셋째 외삼촌네 집에는 아들이 탄광에 다니며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고 했다. 아들이 군에서 돌아온 후 탄광에서 일하는데 아침에 강냉이죽 한사발을 먹고 탄광에 가서 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할 적에 석탄을 지고 와서 강냉이와 바꾼 다음 집에 돌아와 함께 강냉이죽을 쒀서 한때를 먹는다고 한다. 집에 있는 사람들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루하루 이렇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2년 전 지원한 물자며 돈들은 이미 다 써버린 상태였다. 북한의 관료들은 강도들이다. 약간의 착오가 있으면 북한돈으로 몇만원(북한돈 180원이 중국돈 1원에 해당)씩 벌금을 내린다. 몇만원이 북한에서는 천문학적인 숫자나 다름없다. 그런 일 몇번 겪으면 돈이 많이 축나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은행은 돈을 저축하면 다시 꺼내지 못한다.
둘째 외삼촌네는 아들이 데려온 며느리가 돈을 훔쳐 달아나는 통에 2년 전 지원한 돈(1,500달러)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북한에서는 사랑이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돈과 음식이 있으면 여자를 얻을 수 있고, 없으면 얻지 못한다. 둘째 외삼촌네는 집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나중에 모든 게 떨어지게 되자 할 수 없이 산 속에 들어가서 초막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삶을 계속하였다.
어머님의 오빠 셋은 한국전 때 인민군을 지원하여 연변에서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나중에 북한에서 가정을 이루고 북한에서 살게 되었으며 공인(노동자)으로 있었다. 북한에서는 농민은 땅이 있기에 뭘 심어 먹을 수 있으나 공인은 이미 20년 동안 공자(월급)도 주지 않은 상태여서 살아갈 길이 없다.
북한은 황폐해진 토지에 비료마저 없는 상태다. 그리고 장기간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먹는 바람에 환경이 열악하게 변하여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한다. 이런 땅에서는 생산량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계절에 따라 나기에 수확계절이 아니면 굶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저녁 제대로 잠도 못 자며 곡식을 지켜야 한다.
부모님은 셋째 외삼촌을 따라 나무껍질이 다 벗겨진 죽은 산림을 지나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산길을 걸어서 벼랑 같은 곳에 도착했다. 그 곳에 둘째 외삼촌네 집이 있었다.
만약 부모님께서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둘째 외삼촌네는 온 가족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거의 다 잡아먹어 산짐승들은 멸종된 거나 다름없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다 벗겨먹어서 식물이 거의 다 죽은 상태였다. 먼지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햇볕이 놀라울 정도로 살을 아프게 하며 땅도 다 갈라터져 있었다.
강냉이죽에 백토 넣어 한끼
둘째 외삼촌네도 온 식구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식구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외삼촌 부부 둘과 딸 하나에 손녀 둘이 전부였다. 그 집에 도착하니 9살 난 어린 조카애가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여 아버지께서 다가가 '너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배가 아파 그런다는 것이었다. 보니까 배가 함지박처럼 불어 있었다. 아마 백토와 소화하기 어려운 풀을 먹었는데 어린 나이에 소화가 안돼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가져간 전통편(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약) 한 알을 먹이고 나서야 애가 차츰 움직일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강냉이죽에 백토를 넣어 하루에 한끼씩 먹으며 산다. 집을 팔고 밭에 곡식이 아직 나지 못한 상태에서 며칠 전 살기 위하여 남의 밭 천평을 김매주기로 하고 국수를 8근 가져왔다고 한다. 그 밭을 매기 위하여 온 집사람이 일하는데 11살난 애는 물론 9살 난 여자애도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날 저녁 때 같이 밥을 먹게 되었는데 이밥(쌀밥)을 해먹었다. 중국에서 가져간 채소와 순대를 함께 먹었다. 11살 난 조카애는 '태어나서 처음 이밥을 먹어본다'며 밥을 한 소래(대야) 먹었다. 북한의 어린애들은 아프리카 애들과 똑같다. 사지가 바싹 마르고 배가 남산처럼 크다.
못 먹는 것은 사람 뿐이 아니다. 초막을 짓고 살면서 집을 지키기 위해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개가 먹지 못하여 부모님이 다가가니 '멍멍'하고 짖는 게 아니라 '어어우, 어어우'하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며 짖었다. 돼지를 기르고 있었는데 돼지는 사람의 똥을 삶아서 먹이고 있었다. 북한의 돼지는 작고 바싹 여위어 돼지꼴이 나지 않는다.
한번은 부모님이 시장에 친척들과 같이 갔다고 한다. 시장에는 거지들이 득실거리는데 대부분 일가친척이 다 죽고 홀로 남은 애들이었다. '이류꾸'라는 물고기를 사려고 파는 아줌마한테로 가니 아줌마가 '어젯밤에 굶어죽은 모양'이라며 판매대 아래에서 두 거지의 시체를 끌어내고 있었다고 했다. 매일 아침 장을 열 때 이렇게 굶어죽은 시체들을 끌어낸다고 한다. 그 때 한 거지가 남의 물건을 확 채 달아나며 먹는 것이 보였다. 음식 주인이 그 거지를 붙잡아서 막 때리는데 거지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정신없이 먹고만 있었다고 했다.
돌아오면서 어머님께서는 한 할멈(북한에서는 30살 이상이면 할멈처럼 보인다)을 보았다고 한다. 바싹 말라 백골을 연상케 하는 할멈이 80근은 족히 되는 감자마대를 메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을 끼웃끼웃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길을 가고 있었다. 함께 있던 셋째 외삼촌의 아들이 '우리는 지금 최후발악을 함다'며 북한에서 집을 나서면 한발짝 내딛는 것도 안간 힘을 다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저렇게 가다가 넘어만 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함다'는 말도 덧붙였다. 넘어만 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북한에서는 귀신처럼 유행하고 있다.
걸어다니는 '산 송장'
부모님께서 다른 조선족의 부탁으로 그 사람의 친척을 찾으러 다른 곳으로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그 차가 뭐냐면 일제시대에 쓰던 목탄차다. 어머님은 80년대에 북한에 갈 때도 그런 차를 타보았다고 했다. 휘발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목탄을 때서 발동하는 버스다. 평양 외 북한의 대부분 지역은 목탄차가 주요 교통도구다. 그것도 매우 모자란 상태여서 어떤 곳은 차가 통하지도 않는다. 고정적인 시간 같은 것도 없고 중도에 고장이 나면 사람들이 하루고 두 날이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어쩌다 차가 오면 사람들이 서로 타려고 벌떼처럼 달려든다. 차 위에도 사람들이 꽉 올라차서 간다. 버스에 사람이 너무 차서 가다가 굽잇길 돌 적엔 막 떨어져나가기도 한다. 목탄차가 목탄마저 없어서 가다가 발동이 떨어지면 길가의 잡초들을 가져다 불을 때기도 한다. 거의 80년을 써온 목탄차라 말이 아닌 것이다. 도중에 두사람이 가스를 마시고 쓰러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두사람을 들어다 길가에 버렸고 차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계속 가던 길을 갔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두사람은 죽었다는 것이다. '한번 넘어만 지면 다시 못 일어난다'는 법칙이다. 구할 방도도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구할 힘도 겨를도 없어 보였다. 다들 상황이 비슷하니까.
어머님의 셋째 오빠는 '이제 오래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길 거다'라며 북한인민들은 북한이 망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새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떠날 적에 조카가 가만히 와서는 '한국이 그렇게 잘산다면서요'라고 물었다. 북한에서도 이제 남조선이라 부르는 대신 '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기타 다른 일들은 내가 잘 모르기에 더 말하지 않겠다. 북한에 가서 아버님이 핸드폰을 빼앗겼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북한돈 몇만원의 벌금을 물고 돌아왔다. 약 1주일 있었는데 피부가 타서 새까맣게 되었고, 먼지가 많은데 씻지도 못해서 머리가 한 광주리는 되었다. 가져간 음식을 먹었다지만 제대로 먹지 못하여 돌아온 후 3일 동안은 누워있어야 했다. 부모님께서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 있다면 그게 조선이다'라고 하셨다.
정리[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