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한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 교황으로 등극하면서 시행했던 신앙운동이 있었다.
회개운동이었다. 그는 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나찌즘에 폭력에 희생당한 폴란드의 한 시민이었다. 그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깊은 각성을 요구하였고, 더불어 과거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신의 이름으로 자행한 죄악을 고백하였다. 문서로 남겨진 교회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고백문에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교회의 침묵에서부터 과거 십자군 전쟁, 아메리카 인디언의 살육에 이르기 까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인간의 폭력에 대하여 죄였음이 고백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자로 추대되었다.
비단 기독교만이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 한 것은 아니다. 세계의 수많은 민족이 자신들의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해왔다. 인간은 때론 신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도덕한 궐기의 정당성을 변호했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이 그러한 부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인간이 신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인간은 때론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신을 참칭하여 인류의 참상을 빚어내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참상을 치유했던 것은 언제나 신의 몫이었다. 때로는 자신의 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실상 신은 모욕을 느끼지 않건만 인간 스스로의 모욕감을 느끼고 흥분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에는 좋은 신이 있고 나쁜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 대화하는 인간의 부류에 따라 신의 모습이 좋게도 나쁘게도 비춰진다는 점이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성난 감정을 가라앉히고 무한히 자애롭고 지혜로운 신 앞에 겸허히 무릅꿇고 기도하는 인간. 자신의 감정과 이성이 신보다 앞서지 않고 평화와 지혜를 겸손히 구하는 자들에게 신의 진정한 축복이 임하였고, 더불어 그 백성도 복을 누렸다.
아마도 우리의 단군과 단군의 백성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홍익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짐승에서 인간으로 해탈한 최초의 각성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에도 복음이 있지만, 우리 한민족에게는 그보다 더 오래된 원시복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며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우리 배달민족은 함부로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우리는 명분없는 전쟁은 하지 않았으며,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할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전쟁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싸워 이기고, 그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러한 내면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국조 삼신, 때로는 부처, 때로는 하나님을 부르며 신앞에 겸손하였고,
신의 이름으로 모든 불의와 맞서왔다.
우리 한민족은 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않는 민족이었기에
이제는 신의 이름으로 축복받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