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이 자신들에게 한일은 맹렬한 비난과 저주를 한다...
일제가 저지른 남경 학살은 죄악이고 자신들이 저지른 티벳학살에 대해선 자신들에 일이니 내정 간섭 하지말란다...
그런데 자신에 백성을 학살하는건 저주 받을 짓이 아닌가?
언어과 풍습 독자적인 정치체제. 독립적인 우편제도 어느 무엇이 자신들과 동일성이 있다고 티벳이 내국의 문제라고 하는가?
침략적 기절을 유전적으로 타고난 지나인들은 우리와는 절대로 이웃해서는 안될 민족이고 우리의 고토를 회복하는 길만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보장 하는 길이다...
우리는 절대로 티벳처럼 되서는 않된다.
중국공산당이 중국 민족주의자들(국민당)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1949년 중화 인민공화국이 건설되면서 티베트의 현대사도 완전히 바뀌었다. 베이징방송은 중국 본토를 하나의 정부가 통치한다는 공산당의 구호 아래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발표하였다. 그 다음해 1950년 10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은 침략을 감행하였다.4만의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 무기도 없이 초라한 티베트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11월에 열리는 티베트 국화 회기중에 의원들은 당시 겨우 16세이던 달라이 라마에게 정부의 전권을 맡아주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나서 곧 티베트 외무부는 UN에 긴급 전문을 띄웠다.
“중국의 침략에 대항할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티베트 정부도 잘 알고 있다. 평화를 신봉하는 나라가 전쟁 준비를 끝낸 나라에게 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UN이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는 침략적 행위를 저지시켜 줄 것을 기대한다.”
침략을 합법적인 것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중국 정부는 1951년 5월 23일 티베트의 국회의원 대표들이 티베트 평화해방안 16개 조항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고 서류에 찍힌 티베트의 도장을 위조하였다. 조약에 따라 티베트의 외교권은 중국 정부로 넘어갔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지역 자치, 완전한 종교적 자유, 판첸과 달라이 라마 두 사람 모두의 복권을 약속하였다.
1951년 9월 9일, 최초의 인민해방군 부대가 라사에 진입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티베트는 직접적인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점령군은 티베트의 봉건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학교, 병원, 철도, 그리고 영화 산업 등의 광범위한 현대화를 약속하면서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중공 라디오와 신문, 광고, 영화를 통하여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공격하였으며 티베트의 불교를 격하시켰고 티베트의 전통 문화가 구태의연하다고 비방하였다. 처음에는 티베트인들의 적의를 바라보기만 했던 중국인들은 차츰 그들이 자신들의 선전에 동조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마침내 분노를 터드리고 말았다. 자신들의 선동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중국은 협박과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존경받는 종교·정치가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범죄자로 몰라 폭행하거나 고문하고 마침내는 사형시켰다. 수도자, 여성, 무력한 시민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참다 못한 티베트인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하였는데 이는 티베트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수천만 티베트인들이 체포되고 보복을 당했으며 토지 개혁이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티베트 게릴라 활동이 위축되었다.
중국과 협상하고 끊임없이 비폭력을 요구했던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비극이 찾아왔다. 1959년 라사와 전국 각지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체포하려는 음모를 진행시켰다. 경호원 없이 올 것을 조건으로 하여 달라이 라마를 연극에 초대한 것이다. 티베트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르불링카 궁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반(反) 중국 구호를 외치는 수만의 군중들과 합세하였다. 라사 전역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이에 대응해 중국은 노르불링카에 포격을 퍼부었다. 1959년 3월 10일 시위에 참여한 약 1만5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으며 그들의 시신이 라사 거리에 나뒹굴었다. 중국이 저지르는 폭력과 살인을 목격한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의 조약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도로 피신했다. 3월 28일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는 티베트 정부의 해체를 발표하였다.
친절을 가장한 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중국 군대는 티베트인들에게 폭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일년이 지나지 않아 중앙 티베트에서 약 8만7천 명의 티베트인이 사살되었다. 포탈라 궁과 노르불링카 궁은 모두 공격을 받았고 신성한 간덴 수도원과 라모체(小初寺) 사원은 파괴되었다.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티베트를 지배하려는 중공의 의중에는 티베트의 불교를 탄압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공산주의와 불교는 공존할 수 없었다. 중국 점령군은 사원의 체계와 학교, 사원, 성지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순수한 신앙까지도 탄압하였다. 1976년까지 6,259개에 달하던 티베트의 사원 중에서 몇 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했다. 백만명에 이르던 수도승과 여승의 사분의 일이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되었다. 성스러운 긴 역사의 교본들이 불에 태워지거나 군대의 뒷간에서 사라져갔다. 신성한 사원의 금, 귀한 보석류들은 사원이 폭파되기 정에 강탈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티베트인의 문화재인 도자기, 불상, 벽화, 세공품들이 중국으로 실려갔다. 이렇게 실려간 것을 녹여서 중국은 메달을 만들거나 국제 골동품 시장에 내다 팔아서 외화를 벌여들였다.
수천 명의 억류자를 수용하고 점령 초기의 재건축 사업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중국은 여러 개의 감옥과 노동 수용소를 지었다. 감옥에 수감된 이들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거나 굶어죽었다.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티베트의 천연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일에 노예처럼 부려졌다.
사태이 심각성은 탄압에 반기를 들던 1959년보다 나아질 바가 없었으며 1966년이 되어서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때 티베트는 가장 급진적인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중국 사회를 대규모 재편성시켰던 문화혁명의 회오리에 말려들고 말았다. 10년 간의 광적인 공포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그러는 동안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강탈범들이 전역을 돌며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자 문화혁명도 막을 내렸으며 등소평은 중국에 자유 경제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티베트에서의 중국의 실수를 인정하고 계엄령을 철회하였다. 자유화 정책이 티베트에서도 실시되었다. 중국인들은 외관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새로운 정책을 실시하는 듯 했다. 몇몇 사원이 재건축되었으며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불교 의식을 많이 허용하여 종교 깃발을 걸 수 있게 되었으며 향을 피우거나 법회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인권협회는 티베트에서의 종교 개혁이 중국의 군사 행동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사원에 딸린 대학의 교육 과정에 심각한 규제가 가해졌으며, 중국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학생들만 입학이 허가되었다. 교본과 지도자 그리고 그 외의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불교 의식만이 허가되었으며 수도승들은 중국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다. 조금만 그들의 체제에 위반되어도 체포나 고문을 받았다. 달라이 라마는 1984년 티베트 봉기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파괴된 사원을 복구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선전을 하였지만 종교 단체에 가입하거나 불법(佛法)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장애가 뒤따랐다. 인상적인 구호를 사용하여 종교와 국가 자치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 것은 단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이 환상에 그치고 말았듯이 중국의 경제자유화정책도 인권 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실천되지 않았다. 1980년 전반에 걸쳐 정치 활동을 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체포되거나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중국 경찰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향한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티베트의 시위자들은 결속하였고, 중국 보안 당국의 탄압에 강하게 맞섰다. 1988년 북경 정부는 모든 불평불만자들을 엄단하겠다고 공포하였고 1989년 3월 7일 라사에 게엄령을 발표함으로써 두 민족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수백명이 살해되었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은 그해 말 북경 정부에 의해 자행된 천안문 광장에서의 대학살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였다.
1990년 5월 계엄령이 철폐되었으나 티베트의 보안군은 여전히 중국 통치에 대항하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92년 중국은 체제 전복을 도모한 사람들과 연관된 자료를 찾아내기 위하여 가택 수사를 실시하였다. 불교 관련 책자를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와 연관있는 것, 그의 연설, 녹음 테이프, 기도문, 저서 등이 검열 대상에 포함되었다. 3년 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공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