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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몽골 속의 한국인
몽골 속의 한국인 - 김선정과 간단 사원
최근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몽골에 진출한 한국인들의 모습을 소개한 적이 있다. 몽골 내 반한 감정을 고조시키는 추악한 한국인의 모습이었다. 한국인이 몽골에 진출해서 하는 일이 단란주점이나 술집뿐인 것처럼 보였고, 몽골에 진출한 한국인들이 모두 좋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없진 않겠지만 몽골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민족을 물으면 여전히 한국 사람이라는 대답이 지배적이다. 오늘은 몽골에 진출한 아름다운 한국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선정, 사진 - 불교평론 http://budreview.com/)
김선정이라는 한국인 화가가 있다. 그녀는 홍익대학교 미술학과를 나온 촉망받는 화가였다. 한
국에서 불교미술을 공부하던 중에 티벳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남편인 푸르밧 스님을 만나 몽골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의 불교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불교대학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자 스님인 푸르밧의 청춘이 스며있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교학교는 간단(간단은 사원이라는 말이다) 안에 있다. 간단은 몽골 불교를 대표하는 3대 사원 중의 하나이며, 울란바타르에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다. 울란바타르의 전 지명이 ‘니힐스 후레’였는데, 이는 ‘사원을 감싼 도시’란 뜻이다. ‘간단’이 있는 도시였다는 뜻이다.
불교대학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내용도 발전하고 규모도 커져서 곧 정규 과정의 대학으로 등록될 예정이지만 처음에는 간단사가 내준 텅 빈 강의실 하나로 시작을 했다고 한다. 강의실이 하나 있을 뿐인 그곳에서 모든 문제들을 푸르밧 스님과 김선정 교수가 직접 몸을 부딪혀 해결해야 했다. 처음에 학생들에게 그림과 목조각를 가르쳤는데 붓과 종이 물감이 없어서 일체의 재료와 도구를 구해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돈도 없었지만 당시 몽골에서 이런 물건들은 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김선정 교수 부부가 티벳에서 몽골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짐을 가지고 들어왔지만 그것들은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래서 김 교수는 한국에 나갔다 올 때마다 그런 것들을 지고 오느라고 고추장 한 숟갈 마음놓고 가져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도 늘 짐을 몸에 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유는 기내에 부피가 작고 무거운 것을 최대한 많이 지님으로써 엄청나게 비싼 초과 짐 값을 조금이라도 적게 지불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교수의 생활이 이러하니 당시 학생들의 고생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불교대학 마당에는 당시의 생활을 보여주는 유물(?)이 있다. 사무실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세 개의 컨테이너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 그 컨테이너에는 옷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국의 절에서 받은 헌 옷이었는데, 학생들을 입히기 위해 가져온 그 옷들이 뜻밖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 옷들을 100원, 200원에 팔았는데, 그 옷을 사기위해 시민들이 줄을 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돈이 종자돈이 되어 어린 승려들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오늘날의 불교대학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의 고마운 마음과 가난한 열정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까지도 컨테이너 박스를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불교대학을 들르면 꼭 봐야 하는 특이한 만다라가 있다. 우리 조상들이 여인을 태우고 다녔던 가마 보다 약간 더 큰 “입체 만다라”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화려한 색상과 오묘한 정서가 품어져 나왔다. 한번은 그 입체 만다라를 일본인이 3억엔에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10여년 넘게 공을 들인 작품이라 가격을 매길 수도 없고, 판매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압권은 역시 화폭에 그려놓은 만다라(불교의 이상 세계를 그려놓은 그림)였다. 입체 만다라를 감상하러 가는 길에는 그 귀하다는 만다라가 벽에 거울이 걸려 있듯이 모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놀라운 그림은 난생 처음 보았다. 사실 ‘만다라의 루브르박물관’이라 할 만큼 눈이 부셨다. 학생들이 그림을 배우고 있었는데, 컴퓨터 화면만한 만다라를 그리는데 적어도 1년은 걸린다고 한다. 콩알만큼 작은 공간 속에도 무한한 서사가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정성과 공력이 들어가는 것이니 그림이 곧 공부이고 수행이라 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겠다.
김선정 교수의 남편인 승려 푸르밧은 몽골 사회주의 영향으로 불교 탄압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몽골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있다. 푸르밧 스님은 공산화 시절 승려가 되었는데, 몽골에서는 ‘불모(佛母)’라는 의미의 ‘보른큰치 람’으로 불리고 있다. 스님은 몽골불교를 계승하고, 사회주의 시절 훼손된 불교미술 작품 600여점과 간단사의 불상 복원작업을 해 오고 있으며, 몽골 불교 탄압 시에 대량 학살당한 승려들의 유해를 발굴 수습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승려는 몽골에서 매우 존경을 받는 지위이다. 김선정 교수가 결혼을 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녀가 티벳의 다람살라에서 공부를 할 때, 몽골에서 유학을 온 푸르밧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다. 김선정은 푸르밧과 함께 탕카며 입체 만달라, 참(무서운 가면을 쓴 무당)의 가면 등을 배우게 되었다. 푸르밧 스님은 이미 몽골의 노장 스님들 밑에서 기본을 닦기도 했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서 함께 공부하는 어떤 티베트 스님들이나 화가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진전이 매우 빨랐다. 유학이 끝날 즈음, 푸르밧 스님은 김선정에게 몽골에서 함께 살며 자신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잠들어 있는 몽골의 민족혼을 깨우고 학생들을 데려다가 교육해서 각 몽골에도 민족문화인 불교문화를 다시 살려서 정치적 제약을 초월해 몽골 민족이 문화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후 푸르밧 스님과 김선정 교수의 노력으로 울란바타르 불교대학은 그 명성을 인정받는 몽골 최고의 불교미술 대학이 되었다.
짧은 여행 일정이겠지만, 여행을 끝내기 전에 간단 사원을 들러 김선정 교수를 만나 수태차라도 함께 하면 어떨까?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이 살아날 것이다. 일일이 설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대사관을 비롯한 공관에서 몽골에 진출한 한국사람들의 권익을 살피기 위해 일하시는 많은 공관원들과 그리고 한국의 경제를 책임지고 몽골에 진출해 계신 많은 기업인들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다. 과거뿐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한국이 몽골에서 솔롱고스의 나라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들의 덕분이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면 몽골 속의 한국 사람들을 몇 번 더 소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