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에 있을 때 한 달에 400원짜리 호텔과 한 달에 100원짜리 서민들이 주로 사는 곳에서 지내봤다.
400원짜리 호텔에는 싱구루 침대 2개와 오래된 칼라 TV 전화 그리고 베란다가 있었다.
하루씩 묵는 사람은 50원 내고 혼자 침대 두개 중 하나를 쓸 경우에는 30원씩 내는데 나는 한달에 400원 내고 지냈으니 태국처럼 할인이 많이 됐다.
태국도 북쪽의 도시에 가면 칼라 TV 전화 화장실 밤에 경비원이 있는 깨끗한 모텔이 하루에 7000원 정도인데
한 달씩 7만원에 지냈던 적이 있는데 가격 대비 시설은 중국보다 태국이 괜찮았다.
침대 1개만 사용하면 200원이었는데 짐도 있고 가끔 낮선 이가 들어올 수 있어서 400원 내고 홀로 지냈다.
화장실은 공동이었고 겨울철 목욕탕은 남자 여자 요일을 정해두고 사용했던걸로 기억한다.
목욕은 겨울철에는 근처에 아는 싼 목욕탕에서 3원인가 주고 이용했다.
시설은 다른 집보다 많이 떨어졌는데 아는 집이고 가깝고 해서 겨울철엔 이집을 자주 갔었다.
목욕탕에 가족탕이 있었는데 하루는 카운터에 돈을 내고 서 있는데 가족탕에서 한국에 부인이 있는 남자와 조선족 여자가 나오는 걸 보았는데 난 저러지 말아야지 저건 아니야 노실하고 고정하게 살아야 돼 하면서 다짐을 했는데 그 뒤는 오래돼서 나도 10원짜리 가족탕에 갔는지 안 갔는지 가족이 없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목욕탕 구석에서 손으로 구석구석 한참 밀고 있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때미는 조선족 남자가 내 벗은 모습도 구질구질(?)하게 보였는지 옆으로 와서 자기가 돈 안 받고 그냥 때를 밀어 주겠다고 해서 괜찮다고 거절한 적이 있었다.
가끔 갈 때 일회용 면도기를 갖다 주곤 했는데 자그마한 선물에도 고마워 하는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괜찮은 조선족이었다. 나는 지금도 동남아 3달 순회공연을 갈 때 마다 이 양날 일회용 면도기 준비하는데 하나면 충분하다.
방과 베란다 사이는 2중문으로 되어 있는데 간격이 40센치 정도라 겨울철에는 박스채로 재워둔 청도 캔 맥주나 포도주를 가끔 마셨는데 캔 맥주나 포도주의 온도가 그만이었다. 주로 저녁에 밥 먹으러 나가기 귀찮고 하면 준비해둔 땅콩, 북조선산 밤 그리고 진공 계란이랑 같이 먹는데 일반 수퍼보다 시장이 가격이 괜찮고 가깝고 해서 주로 근처 시장을 이용했다. 해바라기씨는 손과 입만 분주해서 그런지 맥주 마실때는 잘 안 먹었다.
밖에 나가서 저녁을 할 때는 근처에 있는 시장안에서 3원 주고 토장국으로 주로 해결했는데 겨울철엔 시장이 6시인가 일찍 문을 닫았다.
6시 이전에 저녁을 먹은 후 9시경에 출출하면 젊은 한족 부부가 하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10개에 2원 50전
짜리 찐만두를 간장과 그냥 주는 마늘과 같이 먹곤 했었다.
하루는 만두를 먹고 있는데 70정도 쯤인 한 할머니가 만두를 찌는 불가에서 쪼그리고 않아서 불을 쬐고
있었다. 그때 당시 영하 15도는 되었는데 포장마차에 들어와서 식사도 안하고 입구에서 불만 쬐는게 이상해서
얘기해보니 위대한 조국 북조선에서 온 할머니였다.
10명중 9명이 나를 위대한 조국 북조선에서 온 북조선인으로 보는 이 곳에서 짝뚱 탈북자인 나는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만두 한 접시를 시켜서 할머니에게 드리고 나서 오늘 어디 묵을데는 있냐고 물으니 없다고 해서
그럼 근방에 있는 침대가 두 개인 제 숙소에 가자고 하니 계속 괜찮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겨울철에 위험할 것 같아서 숙소로 와서 1층 직발 아바이에게 얘기하고 같이 가서 여러번 제 숙소로
가자고 얘기 했는데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마 신고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여름철이면 몰라도 그 혹독한 엄동설한에 어떻게 되었는지.....
짝뚱 탈북자인 나는 수 많은 위대한 조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지만 연세도 가장 많았고 가장 안타까운 경우 중 하나라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다.
그 날밤 숙소로 돌아와서 좀 전에 만난 할머니 생각도 나고 잠도 안오고 해서 문틈 자연 냉장고에 재워 두었던
길림대학에서 만든 약간 단 맛이 일품인 8원짜리 포도주를 찌끄리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젊은 북녀들도 찾아와서 부담없이 노크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