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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리쥔은 누구인가 – 보시라이를 만난 후

편집부  |  201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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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원화(文華)


[SOH] 문회보(文匯報) 동북특파원으로 있다가 보시라이에 의해 체포되어 10여년간 감금되었던 장웨이핑 기자는 왕리쥔이 보시라이와 처음에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베이징 언론계에 종사하는 한 친구에 따르면 리펑은 보시라이에게 아주 호의적이었고 또 왕리쥔에게 빚을 졌다. 권력에 빌붙을 기회를 잘 잡는 보시라이는 즉각 2003년 5월 왕리쥔을 랴오닝성 톄링시 공안국장이자 당서기(부시장급)에 임명했다. 뒤이어 또 2004년 11월에는 랴오닝성 진저우(錦州)시 공안국장이자 당서기(부시장급)로 옮겼다. 당시 보시라이는 랴오닝성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립된 상태였다. 때문에 왕리쥔과 같이 중난하이에 배경이 있으면서 자신의 앞잡이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반면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왕리쥔은 작은 도시의 공안국장에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포부가 컸다. 두 사람은 이렇게 죽이 맞았고 이때부터 환상의 콤비를 이뤘다.”


“왕을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해 보시라이는 그를 샤더런(夏德仁)에게 직접 소개했다. 샤더런은 전에 다롄 동북재경대학(東北財經大學) 총장을 지냈고 당시에는 부(副)성장으로 있었다. 왕은 샤더런의 도움으로 2006년 4월 동북재경대학 MBA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고 20여 만 위안의 학비도 공금에서 지원해주었다. 또 대리시험을 치는 등의 방법으로 석사학위까지 받게 했다.”


“이때부터 왕리쥔은 남부럽지 않은 학벌을 갖게 되었고 게다가 타흑의 영웅적인 경력이 더해졌다. 뿐만 아니라 리펑의 심복이자 태자당의 중요인물인 보시라이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정말로 세력을 얻었고 사기가 충천했다. 왕리쥔의 직책이 높아지면서 애초의 공평하고 정의로운 충정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많은 동료와 상사들에게 죄를 지었고 또 일반 시민들을 무시했다. 멋대로 차를 몰아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고 여러 번 고발 당했다. 다행히 보시라이와 리펑이 무마해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감옥에 들어갔을 것이다.”


장웨이핑 기자는 보시라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랴오닝성 언론계에 있는 친구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문화혁명 기간에 7년간 감금되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으며 심리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은 감옥에 보내야만 편안히 잘 수 있다고 여긴다. 설사 당내의 동지라 해도 마찬가지며 이중에는 그를 도와준 적이 있지만 나중에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된 사람들도 포함한다. 때문에 직접 랴오닝성 선양감옥 확장개조공사를 주관했고 다롄에도 아시아 최대의 간수소를 건립했을 뿐만 아니라 선양 베이링(北陵)에도 가장 완벽한 시설을 갖춘 감옥을 건설했다. 그는 매주 감옥이나 간수소에 가서 시찰하곤 했다. 그는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보면서 과거 자신이 친청 감옥에 갇혀 있을 때를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2007년 베이징 중난하이 내부투쟁 중에서 패배한 보시라이는 충칭으로 쫓겨났다. 그는 늘 억울함과 증오를 풀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이에 장쩌민, 리펑 등 태자당을 등에 업고 마오쩌둥 방식을 끌어다 홍가(紅歌)를 부르고 홍서를 읽으며 홍색 문자를 보내며 시민들을 미혹시켰다. 그 후 탐오에 반대한다는 구실로 타흑(打黑)운동을 벌여 처음에는 왕양의 부하들과 기업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왕리쥔이 맹렬한 활약을 보였다. 이에 충칭은 법도 업고 하늘도 없는 홍색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중국 옛말에 ‘성공도 소하(蕭何) 탓이고 실패도 소하 탓’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왕리쥔이 순조롭게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보시라이의 발탁 덕분이지만 그가 몰락한 것 역시 보시라이가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으로 말해 보시라이는 왕리쥔에 의존해 충칭에서 전횡할 수 있었지만 결국 왕리쥔의 배반으로 몰락했다. 두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상대방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리쥔이 랴오닝 톄링에서 발탁한 구펑제 역시 마찬가지로 응보를 받았다. 1994년 7월 왕리쥔이 중국 인민공안대학 관리간부학원 관리전공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랴오닝에 돌아온 후 그의 직위는 테파시 공안 부국장에서 톄링시 공안 부국장으로 변했다. 톄링시는 톄파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지만 인구는 훨씬 많은 곳이다. 톄링은 인구 약 300만의 도시로 주민들은 농업을 위주로 한다. 왕리쥔은 36세부터 44세까지 8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다 2003년 5월 보시라이의 발탁으로 톄링시 공안국장 겸 당서기가 되었고 나중에 더 큰 진저우시로 옮겨가 공안국장 겸 당서기를 맡았다. 이 두 도시는 모두 부청장급 대우를 받았다. 톄링을 떠나기 전 왕리쥔은 친구인 구펑제(谷鳳傑)를 후임으로 삼았다.


관방의 자료에 따르면 구펑제는 1954년 랴오닝성 신빈현(新賓縣) 출신으로 왕리쥔보다 5살이 위다. 자칭 만주족인 구펑제는 왕리쥔에 이어 톄링시 공안부국장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안업무에 종사한 적이 없다. 그는 푸순시(撫順市)의 한 향진(鄉鎮)에서 영화상영원으로 일하다 나중에 부진장, 부서기를 거쳐 진장, 서기 및 푸순경제개발구 기술발전 총공사 사장 등을 맡았다.


2011년 5월 6일 오후 3시 구펑제가 공안건물에서 회의에 참가했을 때 기율위원회 조사원이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걸어서 회의장에 들어와 그를 연행했다. 이날 저녁 공안국 내부에서는 구펑제가 쌍규(雙規)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사 결과 구펑제가 탐오한 뇌물이 2,300만 위안에 달했고 이중 가장 큰 것은 공안건물 공사비에서 960만 위안을 횡령한 것이다.


구펑제의 업적에 대해 공안기관에서는 3기(三基) 공정을 내세운다. 즉 기층을 움켜쥐고 기초를 다지고 기본기를 연마한다는 것이다. 민중을 감시하고 파룬궁 수련자들이 진상자료를 부착하거나 배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테링시 공안국은 519개의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이렇게 소모한 비용이 수천만 위안에 달한다. 당시 구펑제가 대신 비용을 냈으며 나중에 매년 70만 위안의 고정지출과 5천만 위안에 달하는 통신사의 투자를 받아냈다. 그러나 이중 상당액을 구펑제가 횡령했다.


민중들은 왕리쥔부터 시작해 톄링공안국장이 장악한 돈이 재정국장보다 더 많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공안은 멋대로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데 이런 돈이 모두 공안국의 사금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펑제는 일찍이 2006년에 쓴 글에서 3기공정이 시작된 이래 톄링공안국에서 투입한 자금이 2억 6780만위안이라고 했다. 이중 얼마나 많은 돈이 횡령되었을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왕리쥔이 떠나긴 했지만 구펑제는 그의 연줄을 이용해 수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다.


2012년 1월 31일 구펑제는 수뢰죄와 출처가 불명확한 거액의 재산을 지닌 죄로 선양시 위훙구 법원에서 징역 12년에 추징금 980만위안 판결을 받았다. 또 다른 죄명인 탐오와 직권남용 등에 대해서는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현지 민중들은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여겼다. 어떤 사람은 980만위안이면 그가 2년간 관직을 팔아먹은 것밖에 안된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구펑제 사건은 베이징에서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결국 유기징역을 받은 것으로 만약 뒷배경이 없었다면 980만 위안의 횡령만으로도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했다.


구펑제가 판결받기 전인 2012년 설 기간에 중앙기율위원회 요원들은 이미 충칭에서 왕리쥔을 찾아가 그가 랴오닝에 있을 때 탐오한 문제를 조사했고 뒤이어 세상을 놀라게 한 이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왕리쥔의 일생을 살펴보면 미국 중부파룬따파 협회 책임자 양썬(楊森)이 말한 것처럼 ‘매 사람에게는 모두 장부가 있고 또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남이 모르게 하려면 스스로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마라,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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