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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의 아버지 - 보이보

편집부  |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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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H]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는 덩샤오핑 시대 중공 8대 원로 중 한 명이며, 모친인 후밍은 당시 보이보의 비서였다. 두 사람의 간통 사실이 드러나자 보이보는 전처와 이혼하고 후밍과 재혼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반당분자로 몰린 보이보는 12년 간 투옥됐고 후밍은 자살했다. 부모의 이런 유전인자는 보시라이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보이보는 후밍과의 불륜이 들통 나자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의 아내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후밍이 세 번이나 아이를 낙태하자, 결국 이혼을 승낙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중공 고위층이 특권을 누리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보이보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옌시산 재정청장을 역임할 당시 보이보는 고위층 못지않은 호화생활을 누렸다. 그는 외설 외화를 좋아했으며, 1949년 이후 일곱 식구와 함께 3곳의 대정원을 차지했다. 또한 20만 위안의 국고를 들여 매년 집을 수리했고, 베이다이허에 있는 여름별장도 국고로 증축했다.


보이보는 새로운 차를 보면 무조건 바꿨고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대출과 요양비 등의 명목으로 사용한 공금은 5,000여 위안에 달했다. 또한 보이보는 매월 400여 위안, 후밍은 200여 위안의 급료를 받았으며, 이와 별도로 사무관리국에서는 매월 보조금으로 200위안을 지급했는데 당시 도시 주민 한 가구의 수입은 수십 위안에 불과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자료를 보면 보이보의 아내 후밍도 그에 못지 않았다.


‘후밍은 보이보의 권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 병을 핑계로 장기간 출근하지 않았음에도 제2경공업부 공업예술국장으로 승진했다. 국장으로 임명되자 그녀는 세 명의 비서를 두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1950년 이후 후밍은 다섯 차례 외국을 방문했는데 대부분 보이보의 명의를 이용해서였다. 해외에서 후밍은 관련 규율을 어기며 외화를 심하게 낭비했다. 그녀가 프랑스에서 구입한 승용차는 현재 대사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민족정서를 무시한 채 기모노를 입고 사진을 찍어 정치적인 반발이 심했다. 또 화교에게 3,000만엔을 빌려 일상용품을 구입하고는, 귀국 후 제2경공업부에서 그의 산둥 친척에게 갚게 했다. 자금을 담당한 산둥 인민은행은 이에 항의했지만 그녀가 부총리의 부인인 탓에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1965년 11월 보이보는 중앙 고위층 인사와 서남 출장을 떠났다. 당시 후밍은 둘째 딸과 함께 요양차 광저우에 머물렀는데 주변의 대우에 불만스러웠다. 보이보가 없어 오직 규정에 따른 대우만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특별대우를 받기 위해 자오쯔양을 통해 보이보에게 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했다(사실 딸의 병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연락을 받은 보이보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광저우로 날아갔다.’


1966년 8월 중공의 제8기 11중전회가 끝나자 마오쩌둥과 장칭은 ‘61인 반역자집단 사건’을 이유로 류사오치를 ‘배신자를 받아들인 조직노선’을 결성했다고 비난하고,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중국 전역에서 ‘반역자 색출’ 열풍이 일어났다.


이 열풍에 1967년 1월 광저우에서 요양 중이던 보이보는 홍위병에게 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돼 비판투쟁(批鬪)을 당했다. 1967년 1월 15일 조반파에게 광저우에서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후밍은 이송 도중 열차에서 사망했다. 기차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투신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갑작스럽게 덮친 큰 변화에 보씨 일가는 모든 것을 잃고 임금도 더 이상 지급되지 않았다. 아직 미성년이거나 직업이 없던 아이들은 돌아갈 집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였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1967년 12월 하순 당시 20세였던 보시융과 18세였던 보시라이, 그리고 16세였던 보시청은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


1976년 10월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덩샤오핑은 기존의 판결을 뒤집고 장칭, 과장춘차오, 야오원위안과 왕훙원을 중공 내부투쟁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이들 ‘4인방’은 마오를 대신해 ‘문화대혁명’의 죗값을 치렀고 문화대혁명은 종말을 고했다.


1978년 중앙조직부 부장을 담당한 후야오방은 문혁기간 중 누명을 쓴 간부들을 복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이보의 복권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해당 사건은 마오쩌둥이 직접 결정한 것이어서 맘대로 뒤집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후야오방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1978년 12월 보이보는 마침내 복권되었다. 하지만 보이보는 1987년 1월 후야오방이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앙 총서기직 사퇴를 강요받았을 때, 이를 뒤에서 조정했다.


이처럼 보이보는 자신의 은인인 전처와 후야오방을 잇달아 배신했다. 이러한 유전인자는 보시라이의 인격 형성에 은연중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베이징 4중학교 고등부 1학년이었던 보시라이는 가장 먼저 홍위병이 되었다. 문혁사학자 쑹융이(宋永毅)는 보시라이의 동급생과 교우들을 통해 당시 그의 행적을 조사했다. 보이보가 실각하기 전 보시라이는 ‘영웅 아버지에게서 훌륭한 아들이 나온다’며 계속해서 혈통론을 부르짖었다. 또한 당시 적색테러의 분위기를 이용해 평민가정 출신의 동급생을 구타했다. 그의 성적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4중학교를 같이 다닌 동급생들은 그를 ‘도량이 좁고 거만하며 위선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문화대혁명 초기, 보시라이는 홍위병 시청구(西城区) 규찰대와 ‘수도 홍위병 연합행동위원회(首都红卫兵联合行动委员会 이하 연동)’에 적극 가입했다. 연동에는 당시 부모의 직위가 13급 이상 되어야만 가입자격이 주어졌다.


홍위병 규찰대는 저우언라이와 베이징 수비대의 지지를 얻었다. 1966년 8월부터 홍위병이 벌인 대규모 가산징수와 비판투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베이징은 피비린내 나는 붉은 8월로 변했다. ‘9평 공산당’에 의하면, 1966년 8월 베이징 홍위병은 ‘송환’이라는 명목으로 지주, 부자, 반동, 악당, 우파로 분류된 베이징 주민을 베이징에서 쫓아내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정부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3만 3695호의 베이징 시민이 재산을 몰수당했고, 8만 5198명이 베이징에서 쫓겨나 원적지로 송환됐다.


당시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은 베이징의 주민구성을 ‘유리’나 ‘수정’처럼 깨끗하게 하려면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시민을 모조리 베이징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위병의 무차별적인 폭력행위는 사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었다. 당시 공안 부장이었던 셰푸즈는 공안경찰에게 ‘홍위병을 막지 말고 그들의 참모가 되어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홍위병은 당시 당국에 이용당한 것에 불과했다. [신기원 전재]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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