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著: 육서성
演記: 한치선(타타오)
[SOH] (전편에 이어) 달기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지는 순간 마시 역시 알아보았다.
그녀는 여와의 밀지를 함께 받았던 비파 정령이었던 것이다. 곤연은 그 특유의 백옥 같은 손을 내밀어 감히 달기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우 달기야! 언니도 수고가 참 많은 거 내 안다. 하지만 나도 여와낭랑의 밀지를 같이 받은 입장 아니냐? 나도 언니와 함께 이 나라를 통째로 멸망의 늪 속으로 쳐 박아 넣어야 하는 입장이란 말이지. 왜? 나도 정과를 얻고 싶거든? 그것도 미칠 정도로!”
관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궁궐 내 어느 정자에 서서 초조한듯 서성이고 있었다. 사뿐사뿐 정자에 오른 곤연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사내는 흠칫 그녀를 보고는 얼른 주변에 눈이 없는 지 둘러보고는 얼마 나지 않은 수염을 내리 쓸었다.
“나한테 전할 게 있다는 게 뭔가?”
곤연은 그의 손에 비단주머니 하나를 쥐어주며 사내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염중대부께선 짐작하시지요? 이것은 소미인의 편지이옵니다.”
비단주머니를 받는 염중의 손이 멈칫 떨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소미인께서 내게 왜 이런…?”
“이 자리에서 읽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확답을 달라 하셨지요.”
염중은 안절부절하다가 비단주머니를 열어 편지를 꺼내는데 그 손이 사뭇 흔들리고 있었다.
편지를 스르륵 훑어본 염중의 눈알은 긴장하여 마치 누가 뒷통수를 치면 눈알이 앞으로 쏟아질 것 처럼 보였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강황후를 무슨 수를 써서든지 폐위시키라고? 그게 말이 되는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리고 내가 왜 그런 위험한 짓에 목을 건단 말인가?”
곤연은 손에 따로 들고 온 연자(蓮子)를 한알씩 연못에 던지며 잉어들이 모여드는 것을 즐기더니 말했다.
“문무백관 중에서 염중대부님만한 머리가 있을까요? 충분히 좋은 계책을 만들어 내실 겁니다. 아,그리고 거부하실 생각은 애초에 접어두시길! 애초에 달기낭랑을 전하께 추천한 이가 누구던가요? 어차피 낭랑께서 황후와 귀비들의 입김에 떠밀려 내쳐지기라도 하는 날엔 맨 먼저 처벌을 당할 이는 염중 대부일 것입니다.”
염중이 얼굴이 흙빛이 되며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려다가 누가 볼까 싶어 얼른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낮게 소리치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자네! 입이 뚫렸다고 아무 말이나 뱉는 것인가? 내가 문무백관 중에서는 주상(主上)의 신임을 가장 받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가?”
곤연은 연자씨를 한번에 연못에 확 뿌리더니 냉큼 염중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 콧김이 닿을 것 같은 곳까지 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압니다 알아요! 그걸 누가 모를까요? 주상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대신이라면 만조백관이 모두 미워하는 과녁이라는 뜻도 되겠지요? 아닌가요?”
염중의 눈 흰자위에 몇 개의 실핏줄이 터지는데 곤연은 말을 빠르게 이었다.
“대부와 우리 낭랑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황후와 귀비들은 소낭랑에게 이미 전쟁을 선포했고요! 시간이 없습니다. 우물쭈물 주저하다가는 소미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일이 생길지 모르지요. 그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군요. 그러니 이제 다른 생각을 싹 지워 버리시고 단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춰 보세요. 단 한가지!”
곤연은 염중의 가슴에 손가락으로 네 글자를 쓰며 얇은 입술을 움직여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廢位皇后(폐위황후)!”
희대의 간신은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 차도살인(借刀殺人)...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다
염중은 순간 그녀를 밀어버리고 노려보며 말했다.
“처,천한 것이 소미인의 궁녀가 되고 주상의 악사가 되더니 예절도 겁도 없어진게냐?”
“저 곤연은 지금 주상의 귀를 즐겁게 하는 음률이며 주상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달기낭랑의 입이네요. 이 천한 소녀가 염중대부께 딱 3일의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3일 안에 회답이 없으시면 다른 영웅을 찾아보렵니다.”
곤연은 말을 마치고 스르르 치마를 끌며 수선궁으로 사라져 가버렸다.
염중 역시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기에 총총히 퇴궐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침착하게 정리해보자. 이 어지러운 궁궐 속에서 지금의 내 위치를 세워 온 것이 다 내 머리와 세치 혀 때문이다. 이제 그런 나에게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험이 주어졌구나! 어느 문이 생문(生門)이고 어느 문이 사문(死門)인가?’
염중은 이틀째 아프다는 핑계로 입궐도 하지 않고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을 이어왔으나 이렇다할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황후가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는 바로 4진 제후 중 그 유명한 동백후(東伯侯) 강환초(姜桓楚)이며 동로(東魯)지역에 웅거하고 있다. 용맹한 군대가 백만이며 휘하의 장수만 천명은 된다. 그 장남인 강문환(姜文煥)만 하더라도 삼군에서 용맹이 으뜸이다. 내가 만약 삐끗하면 뼈도 못추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우물쭈물하다가 달기낭랑에게 답을 못하기라도 한다면?
달기가 베갯머리 송사를 하여 나를 비난이라도 하는 날엔 난 곱게 사지를 가진 채로 무덤에 묻힐 가능성마저 희박하다! 그래! 달기는 포락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형구까지 만든 괴물이다!’
이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추(反芻)되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그는 대청마루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그의 앞마당을 한 건장한 30대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6척장신에 유난히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굵은 눈썹에 단단한 콧대가 마치 쇠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강인한 풍모였다. 염중이 그를 잡아세우고 물었다.
“자넨 누구인가?”
사내는 서둘러 염중에게 몸을 조아리며 대답했다.
“소인은 강환(姜環)이라 하옵니다.”
“그래. 우리 집에 지낸 지는 얼마나 되었지?”
“동로(東魯)를 떠나 이 댁에 머문 지는 5년입니다. 줄곧 신세를 져왔는데 그 은덕이 하늘같으나 어찌 갚아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염중은 그를 보며 머릿속을 가득 매웠던 먹장구름이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환아! 고개를 들어봐라. 내가 널 긴히 쓰고 싶구나! 이 일이 잘 되면 너에게 내릴 복록이 크리라. 마음을 내 보겠느냐?”
“불 속에 들어가라셔도 따르겠습니다. 이 한 몸 제대로 쓸모 있게 살아보고 싶었사옵니다.”
염중은 강환의 대답이 시원스러운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으며 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계책들이 일어서서 순서대로 정렬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늦둥이 아들을 부르듯이 강환에게 손으로 가까이 오라 하더니 그의 눈을 빤히 쳐다 보고는 일어서서 비밀 방인 숙정실(肅靜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날 늦도록 그 방의 불이 밝혀 있었다.
수선궁의 달기는 깊이 잠에 떨어진 주왕을 보고는 일어나 악사 곤연을 향해 한꺼풀 엷은 속곳만 걸친 채로 소리없이 걸어갔다. 근래에 주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존재는 달기이며 그 다음이 곤연이었을 정도로 그녀 역시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 달기는 도자악기에 비단을 깔고 앉아있는 곤연의 얼굴을 바짝 밀착하여 바라보며 눈짓으로 상황을 물었고 곤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기는 활짝 웃음을 머금고는 가슴이 벅차오는지 두 손을 갖다대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며칠 후 아침-주왕은 잠에서 깨어 눈을 반쯤 뜨고 습관처럼 읊조렸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로구나…”
달기가 그 기척에 얼른 일어나는데 이미 주왕의 목소리를 들은 곤연은 아주 미약한 선율로 비파를 타기 시작했다. 달기는 그 가락에 맞추어 일장춘몽 노래를 흥얼거리듯 부르기 시작했고 주왕은 꿈속에서 또 다른 층의 꿈결로 떠내려가는듯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침상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것이 수선궁에서의 주왕과 그녀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일상은 주연(酒宴)에 음탕한 환락의 연속이었다지만 그가 선호하는 노래나 음률은 사뭇 도가적인 허무가 깃들어 있곤 했다. 어쩌면 그것도 그들 나름의 균형이었는지 모른다.
주로 화원에 깃들어 휴식을 취하던 마시도 그 무렵쯤이면 몸을 산들바람처럼 움직여 그들의 방 창으로 스며들곤 했다. 그리고 그들의 하는 양을 보면서 때로 감탄하기도 했다.
‘주왕도 주왕이지만 참으로 저 요괴들도 지성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완수하려 온 정성을 다하는구나!’
마시의 몸은 분자 차원의 미시적 밀집체라 세포수준이나 겨우 보는 사바세계의 인간들의 육안으로는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왕의 경우 조상의 피를 받아 선천적으로 천목(天目)이 어느 정도 열려 있어 이따금 그녀를 인식할 수 있었지만 다른 무엇에 집중할 때는 마시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처럼 천목이 열린 사람이 천에 하나쯤 세상에는 존재했다. 물론 운중자와 같이 수련으로 천목을 깊게 연 이는 마시를 당연히 볼 수 있었고 요괴들의 경우에도 마시를 볼 수 있었지만 천년여우나 비파정령처럼 인간의 육신을 탈취하여 뒤집어쓴 경우에는 처음에는 보이다가 점점 인간화되어감으로써 미시세계의 구성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마시가 거의 마음 놓고 그들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그들과는 전혀 다른 공간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즉, 시각 청각 촉각 어느 것으로도 쌍방소통은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세상을 위해 뭔가 좀 해보려 했지만 막상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마시는 문득 원시천존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구하려 말라.”
마시는 교수의 그 말을 서른번은 넘게 들었지만 사실 그 본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마시가 자신의 무대가 아닌 이 세상에 와서 아무 참견도 추구도 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보니 이건 강제로 그런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구할래야 구할 수 없다. 추구할래야 추구할 방법이 없다.
‘그건가? 난 단지 이 역사의 변곡점을 후대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전달자였던 것인가?’
이렇게 사념에 잠겨 있던 마시는 문득 달기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하! 조정에 나서지 않으신지 꽤 오래 되었사옵니다. 내일은 길일이오니 한번 조정에 참여하시어 문무백관들과 소통도 하시고 묵은 정사도 보시옵소서!”
주왕은 그런 말을 하는 달기가 기특한지 미소를 지었다.
“그대 말씀이 참 소중하구나! 어진 그대의 뜻을 내 어찌 저버리겠소.”
주왕의 그런 모습을 보며 달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날 주왕이 조회에 나가는데 그를 태운 가마가 용덕전을 지나고 분궁루에 이르러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한 사내가 감히 성큼성큼 내전으로 뛰어올라온 것이다. 머리엔 두건을 하고 손에는 몸은 거구인데 몸놀림은 마치 호랑이처럼 민첩했다. 바로 강환! 그는 손에 칼을 들고 황제를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무도한 임금아! 내 칼을 받아라!”
호위장군인 황비호가 표범처럼 달려들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둘이 엉켜 뒹구는데 순식간에 황비호는 그를 올라타고 손목을 비틀어 칼을 빼앗고는 오히려 그의 목을 겨눈 채 물었다.
“천하에 겁 없는 놈이로구나! 넌 뭐냐?”
“난 동로에서 온 강환이다! 어리석은 임금이 요녀에 빠져 방탕하여 나라를 장차 말아먹으려 하므로 저 임금을 죽이고 우리 주인 동백후(東伯侯)를 새 임금으로 세우고자 왔다!”
주왕의 눈꼬리가 치솟으며 비틀어졌다.
“동백후 강환초의 가신이란 말이냐? 강황후의 부친인?”
황비호는 본능적으로 자객의 말이 맞지않음을 느꼈다. 아직 고문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보낸 이를 바로 실토하여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행태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의 목울대를 움켜쥐고 말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되지 않은 소리냐?”
그때 주왕이 궁이 떠나가게 외쳤다.
“궁 안에 누군가 이 자를 입궐시켜준 자가 있음이 틀림없다. 누가 이 자를 국문하여 배후를 밝히겠느냐?”
주왕의 말이 끝나자 작심하고 있었던 염중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허락하신다면 신(臣) 염중이 심문하여 내막을 밝히고 어지를 받들겠습니다.”
주왕은 근래 자신의 뜻을 잘 파악하는 염중을 아끼고 있던 터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허락했다.
“염중 대부라면 믿고 맡기려네! 바로 심문에 들어가오!”
염중은 자객을 끌어내어 오문 밖에서 심문을 했다. 그런데 그 심문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아무 형벌도 채근도 없이 지극히 평화롭게 끝났고 질문과 대답은 마치 잘 짜여진 대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심문을 마친 염중은 대전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알현했고 주왕은 물었다.
“자객을 심문하니 뭐라 하던가? 배후가 밝혀졌는가?”
염중은 고개를 연신 숙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신은 가슴이 떨려 감히 들은 바를 아뢸 수가…”
“뭔 소리인가? 내막을 알았다면 어서 밝혀야지!”
“신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면 아뢰겠습니다.”
“어허! 그래! 진실을 밝힌다면 무엇이든 용서할 것이니 어서 말해보라!”
염중은 그때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아뢰었다.
“그 자객은 이름이 강환이며 역시 동백후 강환초 가문의 장수입니다. 그는 강환초의 딸이기도 한 중궁 강황후의 뜻을 받들어 폐하를 시해(弑害)하려 한 것입니다. 다행히 천지신명이 비호하여 역모가 발각된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조치하옵소서!”
달기와 곤연이 간신 염중을 만났으니 강황후는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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