演記: 한치선(타타오)
[SOH] (전편에 이어) 한편 두 왕자와 방형제는 목마르고 굶주린 잠행의 길에 마침내 갈림길을 만났다.
방필이 말했다.
“두분 전하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괴롭습니다. 우리 형제가 용기만 있고 아둔하여 노자도 준비 못하고 이렇게 두분을 모시고 달아나게 되었으니 참 큰일입니다. 황장군이 준 보배구슬이 있다곤 하나 이걸 환전하면 바로 추적을 부르는 불씨가 될 것 같아서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넷이 다니는 게 더욱 발각이 되기 쉽고 하니 여기서 길을 나누어 갈라져야 할 듯 하옵니다.”
은교가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만 우리 형제는 어려서 길을 모르는데 어쩌면 좋겠소?”
방상이 대답했다.
“왼쪽 길은 동로로 가는 길이고 우측 길은 남도로 가는 큰 길인데 인가가 많이 있으니 그 길을 따라 주욱 가시면 됩니다.”
은교가 말했다.
“나는 동로로 가겠소. 은홍아! 너는 남도로 가거라. 이리 해야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긴다. 내가 동백후 외할아버지를 뵙게 되면 우리 억울한 사정을 말씀드릴 것이니 그러면 외할아버지는 반드시 극대노하여 군사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보내 너에게도 전갈을 할 것이다.”
방필이 말했다.
“우리 형제도 어딘가에 몸을 기탁하고 있다가 두분 전하 중 어느 분이든지 군사를 얻어 저 주왕을 치러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반드시 나서서 그 선봉에 서겠나이다!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하는 마음 미어지오나 두분 부디 옥체 보중하소서!”
방형제는 먼저 숲속 길로 들어가 살길을 찾아 떠났고 은교와 은홍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서로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은교는 아우 은홍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때서야 나무에 기대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반면 은홍은 혼자가 되자 오히려 이를 악물고 눈을 번득이며 인가가 모인 길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슬픔과 두려움보다 눈 앞에 닥친 것은 굶주림이었던 것이다.
은홍이 어느 촌마을을 지나다보니 몇 사람이 둘러 앉아 평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구수한 밥냄새와 음식내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그가 언제 구걸을 해보았겠는가? 능라비단옷에 언제나 진수성찬이었으니 한번도 배고픔이란 것을 겪어본 일이 없었던 은홍은 어찌할 바를 몰라 서 있었다.
요정 마시는 그들 왕자가 걱정되어 궁에서부터 뒤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갈림길에 이르러 더 어린 은홍을 따르고 있었다. 마시는 체면 때문에 입을 못 떼고 있는 은홍이 답답하여 그의 이마에 붙어 한마디 목청 좋게 소리쳤다.
“험험! 이리 오너라!”
막상 소릴 치고는 은홍 자신이 당황하여 입을 가리는데 밥을 먹던 사람들은 일제히 그 어린 소년을 쳐다보았다.
“넌 누구냐?”
“어느 마을에서 왔는데 어른 들 보고 오라마라냐?”
그 중 한 노인이 고개를 뽑고 유심히 그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옷을 보면 비단 옷이니 귀한 집 자제 같은데 무슨 일을 당해서 흙먼지를 뒤집어 썼느냐?”
은홍이 아직 망설이는데 마시는 그의 전두엽을 콩콩 두드리며 자극했다.
‘당당하게! 당당하게 밥을 달라고 해!’
마침내 은홍이 어깨를 펴고 말했다.
“과인에게 밥을 가져오거라!”
모두들 어리둥절했고 누군가는 피식 웃고 있는데 아까 그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뭣들 하는게냐? 저분이 시장하신가 보다! 어서 밥상을 따로 차려 드리거라! 아! 거기 생선도 한마리 구워라.”
은홍은 저절로 그 노인을 향해 꾸벅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작은 소반에 밥과 찬이 차려지자 허겁지겁 서서 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세끼를 거른 후의 식사인지라 밥이 씹기도 전에 목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며 은홍은 너무나 맛있어서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아, 누가 쫓아옵니까? 앉아서 천천히 드시구려!”
은홍은 그 말을 듣고서야 평상에 앉아서 모두들 쳐다보는 가운데 밥을 두그릇이나 맛나게 비웠고 생선은 살을 다 발라먹고 머리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엄마뻘 되는 아주머니가 숭늉을 가져다주니 그것을 마시는데 아주머니의 손을 보는 순간 그제야 다시 설움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쏟으며 흐느끼고 말았다.
“이 마을 음식은 어찌 이리 맛있는 거요? 살다살다 처음 보는 맛이외다.”
사람들은 깔깔 웃었고 아주머니가 물었다.
“도령은 몇살이우? 내 아들 나이쯤 되것는데?”
그 말에 은홍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직히 대답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께 크게 신세를 졌는데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겠소이다.”
노인이 물었다.
“어린 도련님은 뉘신데 어디를 가는 길이오?”
은홍은 불안하여 대답을 못하는데 마시는 그의 귓속에서 속삭여주었다.
‘속이나 시원하게 밝혀! 죽을 사람은 발버둥쳐도 죽고 살 사람은 절벽에서 밀어도 살아남는 법이야!’
은홍은 말했다.
“난 천자인 주왕의 둘째 아들 은홍이라 하오. 내 인생에 난이 닥쳐 궁을 벗어나 이리 피난길에 올랐는데 지금 남도의 악숭후를 찾아 내 몸을 의탁하려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고 노인은 아뢰었다.
“왕자 전하! 알아 뵙지 못하고 제대로 영접도 못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은홍이 말했다.
“궁밖에서 이렇듯 헤매다 보니 오히려 여러분같이 사람냄새 나는 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제 목을 취하려는 군사들이 바쁘게 달려오고 있을 테니 나는 이만 가봐야겠소. 여러분은 그들이 묻거든 모른다고만 좀 해주시오.”
은홍이 바로 일어서서 가려는데 아주머니는 주먹밥을 몇 개 단단히 뭉쳐서 작은 보따리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은홍의 손을 꼬옥 잡고는 놓지를 못했다. 노인이 얼른 말리자 겨우 손을 놓고는 말했다.
“조심히 가시고 나중에 좋은 모습으로 꼭 다시 들러주시오. 왕자전하!”
은홍은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는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자 인가도 끊어지고 길은 좁아지면서 풀이 자욱하게 무성하고 소나무 그늘은 해 질 녘의 숲길을 더욱 어둑하게 만들고 있었다.
‘곧 해가 질텐데…’
길이 끝나는 쪽에 오래된 사당을 발견한 은홍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쪽을 향했다. 사당 입구에는 헌원묘(軒轅廟)라고 쓰여 있었다. 은홍은 사당 안으로 들어가 헌원상 앞에서 할아버지라도 만난듯 엎드려 절하며 아룄다.
“헌원 성주(聖主)님! 법도를 세워 의복과 예악을 만드시고 시장을 여신 상고(上古)의 성군님! 저 은홍은 성탕(成湯)의 31대손이고 주왕의 자식입니다. 이제 부왕인 주왕이 무도하여 아내를 죽였으며 자식마저 죽이려 하므로 저는 이렇게 피신중입니다. 오늘 하룻밤 몸을 의탁하고자 하오니 돌봐주십시오! 이 조그마한 몸 오늘 밤 보존하게 된다면 후일 반드시 이곳에 와서 사당을 수리하고 성제님의 몸을 금으로 치장해드릴 것입니다.”
기도가 끝나자 온몸의 피곤이 엄습하며 은홍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헌원의 상이 자비로운 표정을 하고 소년왕자의 자는 모습을 굽어보는듯 했다.
■ 태사수용(太師收容)... 태사부에 숨어든 은교, 뜻밖의 보호자를 만나다
한편 태자 은교는 동로(東魯)를 향해 한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해 질 녘에 눈 앞에 큰 저택이 보이는데 현판에는 태사부(太師府)라 써 있었다. 은교가 문을 삐걱 열었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 마을 벼슬아치의 집인가보다. 그런데 나를 보면 바로 추격병들에게 넘기지는 않으려나?’
불이 켜진 방이 있어 다가서보니 그 안에서는 긴 탄식소리가 들려오더니 노인이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초야에 묻힌 신하의 마음 아직도 궁궐에 있건만
황제의 궁궐 두드릴 방법 없어
신령에게 도움을 청해 보네.”
은교는 그 목소리에 삿됨이 없음을 느끼고는 기척을 내었다.
“거 누구시오?”
방안의 노인이 묻는데 그의 모습 뒤에 촛불이 있어 그의 그림자만 보였다.
“저는 동로의 친척집을 가던 중에 날이 저물어 오늘 하룻밤 의탁할까 하옵니다.”
안에 있는 노인이 물었다.
“그쪽 말소릴 들어보니 은나라 도성 조가의 사람 같소이다?”
“맞습니다. 조가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노인이 말했다.
“당신이 도성에서 왔다고 하니 들어오시오. 물어볼 것이 있소.”
은교가 방으로 들어서서 노인을 보더니 놀라 말했다.
“아니! 승상 아니십니까?”
노인 역시 깜짝 놀라며 엎드려 예를 표했다.
“늙어 고향으로 돌아온 신하 상용 눈도 귀도 어두워져 전하를 몰라보고 예가 늦었습니다.”
상용은 고개를 들어 왕자를 자세히 살피며 물었다.
“전하는 국가의 황태자이온데 어찌 지금 홀로 이곳에 이르셨습니까? 필시 큰 변고를 맞이하신 것이 아닌지요? 여기 앉으시어 이 늙은 신하에게 소상히 말씀해주십시오.”
전후사정을 들은 상용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고는 하늘을 우러러 소리쳤다.
“어리석은 임금이 이토록 횡포한 일을 저지를지는 짐작조차 못하였구나! 사람의 도리가 끊어지고 삼강(三綱)의 그물이 끊어졌도다! 백관들은 어찌 벙어리가 되었는가? 말을 못하여 일을 이 지경이 되게 하였는가?”
상용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번쩍 들고는 결심한듯 말했다.
“전하! 마음 놓으십시오! 저와 같이 조가의 궁으로 들어가십시다! 제가 천자께 직접 간언을 하고 잘못된 것을 바꾸어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은교는 노승상 상용의 기상에 감탄하는 일면 자신의 운명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상용은 주변에 일러 밥상을 마련케 하여 왕자에게 허기를 면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추격병들은 워낙 노약한 관계로 하루에 겨우 심십리를 가고 쉬어야 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갈래길에 도달했다. 뇌개가 은파패에게 말했다.
“형님! 여기서 날랜 병사 각 50명씩만 데리고 형님은 동로로, 저는 남도로 추격하는 게 어떨까요?”
“그게 좋겠어. 나머지 약졸들은 여기 주둔하게 하고 말이지.”
“네! 그리고 먼저 왕자를 붙잡은 쪽이 여기 갈림길에 와서 기다리면 되겠지요? 당연히 제가 더 빨리 잡을 것 같으니 미리 와서 기다리겠습니다.”
“후훗! 내가 자네보다 느릴 것 같은가? 좋아! 내가 나중에 오면 내 이 투구를 걸지! 자넨?”
“저는 제 황금 혁대를 걸겠습니다!”
그들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오십명의 날랜 병사들을 골라 각자의 길로 서둘러 출발했는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속도였다.
날을 세워 달리니 그 날래다는 병사들도 기진맥진할 지경이었고 밤이 깊어진지라 뇌개는 멈춰 생각했다.
‘충분히 많이 달렸다. 궁중에서만 지내던 왕자들이 아무리 빨라도 하루 이십리일 것이니 잘못하면 우리가 왕자들보다 앞서 버릴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턴 잘 살피며 가야지!’
앞에 먼저 가던 척후병이 알려왔다.
“저 앞에 사당이 보입니다!”
사당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간 뇌개는 거기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왕자 은홍을 발견하였다.
‘드디어 잡았다! 헌원님 감사합니다!’
그는 먼저 헌원상을 향해 합장하고 예를 올렸다. 헌원의 얼굴이 그렇게 자비로워 보인 것은 그의 인생에 처음이었다.
목표물을 잡게 된 뇌개이지만 잠에 떨어진 왕자가 피곤에 쩔어 색색 잠든 어리디어린 모습을 보고는 살짝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왕자의 잠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쉬게 하고 몇 명의 병사에게 사주경계를 지시하고는 자신은 왕자 곁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새벽- 먼 마을에서 닭이 훼를 치는 소리를 듣고는 은홍은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보니 수많은 병사들이 여기저기 누워 자고 있었으며 자기 바로 옆에는 낮 익은 얼굴이 있었으니 바로 뇌개였다.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저 뇌개입니다.”
“후우! 압니다. 결국 이렇게 헌원사당의 가호도 받지 못하고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요.”
“네! 이제 고생도 끝입니다. 왕자님이나 저나…”
은홍은 자세를 바로잡고는 물었다.
“저를 데려가시렵니까? 아니면 제 목만 가져가시렵니까?”
뇌개는 문득 빨리 잡아오기로 한 은파패와의 내기가 떠올랐지만 은홍의 당당한 물음에 차마 후자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당연히 제가 모시고 가야지요. 마침 푹 주무신듯 하니 일어나십시다.”
은파패는 동로를 향한 큰길로 추격하다가 결국 풍운진에 이르렀고 다시 십리를 가자 흰 담장에 걸린 큰 편액을 보게 되었다.
태사부(太師府)라면? 여기는 은퇴하시고 고향으로 가신 노재상 상용 대인의 거처가 아닌가?’
은파패는 옛일이 물밀듯이 떠올랐다. 은파패는 상용의 문하생이었으며 그를 조정에 천거했던 장본인이 상용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말에서 뛰어내려 문을 들어섰는데 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마침 상용과 은교왕자가 같이 대청마루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파패는 넙죽 절을 올리며 외뢰었다.
“은교전하! 승상 나으리! 무례를 용서하소서! 소장은 천자의 어지를 받들어 은교 전하를 모시고 조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은파패를 알아본 상용은 묵직하게 말했다.
“은장군! 마침 잘 왔네! 조가에는 400명이 넘는 문무백관이 있는데 나라가 이 지경이 되도록 천자에게 직간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 문관들은 죽음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고 무관들은 말을 못하여 그렇고 그저 벼슬만 좋아하고 이름만 탐내는 무리들이 관직에서 녹봉만 축내고 있는 꼴이 아닌가?”
늙은 재상의 불호령을 받을 대상에는 자신 역시 포함되어 있는 줄 알면서도 은파패는 아무 대꾸를 못하고 엎드려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은교가 먹던 것을 꿀꺽 넘기고 얼굴이 누렇게 사색이 된 채 일어섰다.
“승상께서는 노여워 마십시오. 각자의 삶이 중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 길로 돌아가게 되면 아마도 다시 승상께 문안 인사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은교가 가슴을 쥐어짜며 말하는 것을 본 상용은 말했다.
“왕자전하! 안심하십시요! 이 노신이 상소를 준비하여 내일 밝는 대로 함께 궁으로 갈 것입니다. 소신이 그래도 삼대의 천자를 모신 몸이니 천자도 함부로 대하시진 않을 것입니다.”
은파패는 상용에게 조심스레 아뢰었다.
“저로서는…천자의 명이 우선이고 사사로운 정은 그 다음이니 제가 먼저 전하를 모시고 출발하겠습니다. 승상께선 그 뒤에 따라오심이…”
“은장군,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내가 함께 가는 것이 모양새가 좋진 않겠지. 은교전하! 전하께선 은장군과 먼저 출발하시지요. 노부는 뒤따라서 갈 것입니다.”
은교를 데리고 떠나려는 은파패의 손을 잡고 상용은 당부했다.
“어진 제자여! 내가 훌륭한 전하를 자네에게 맡겼으니 그대는 공이 높아지기를 바라지 말게! 천리(天理)가 뒤엉키고 대의(大義)가 무너지면 그 죄는 죽음으로도 감당 못하는 것이니.”
은파패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답했다.
“말씀 새기렵니다. 제가 감히 망령된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들은 약속된 세 갈래 길을 향해 떠났다.
은교는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난 끝났다. 하지만 은홍이가 살아있으니 반드시 이 한을 풀 날이 있을 것이다.’
한참을 가던 그는 세갈래 길에 이르러 군대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가장 보고싶었으면서도 가장 보기를 원치 않았던 존재, 동생 은홍을 보게 되었다. 그는 심장을 인두로 지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비척비척 다가가 은홍을 안았다.
절망적인 표정인 것은 은홍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듯 조금은 더 담담해 보였으며 오히려 형이 반가웠는지 이윽고 활짝 웃음이 만면에 퍼져가고 있었다.
두 왕자 전하가 은파패, 뇌개에게 잡혀 조가까지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비호는 이를 갈았다.
“이 필부(匹夫)같은 놈들! 성탕의 후사를 돌보지 않고 짧은 공을 세우려 하다니! 두고 봐라! 너희 놈들이 봉록을 받을 옷이 피로 물들고야 말리라!”
그는 황명, 주기 등의 심복들에게 명했다.
“오늘 모일 문무백관이 대전에 이르기 전에 오문 입구에서 모이시게 연락하라. 두 전하는 거기를 통과할 것이다.”
이윽고 오문 입구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무성왕 황비호는 우렁차게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 전하, 대부 여러분! 오늘 두분 왕자전하의 안위는 여러분께 걸렸습니다. 저는 무신이어서 간언을 할 언로가 없으니 문관들께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두 왕자는 두 장군과 병사들에 감싸여 오문에 도착하였다.
은교와 은홍은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 황백, 황숙 여러분! 우리가 죽게 생겼습니다! 자신의 죄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으면 고혼야귀(孤魂野鬼)가 되어 떠돈다지요. 우리 형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느 분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요! 사직을 보호할 방도를 찾아주세요!”
모두 숙연해져 고개를 숙이는데 미자계가 다가와 말했다.
“태자전하! 너무 염려 마십시요. 백관들이 모두 상주문을 올려 천자께 아뢸 것입니다.”
한편 은파패, 뇌개는 먼저 수선궁으로 입궁하여 보고를 올렸다.
주왕은 말했다.
“반역한 자식들이 잡혀왔으니 짐이 볼 일도 없다. 속히 오문에서 참수하라! 그리고 시체는 수습하여 매장한 후 다시 결과를 보고하라!”
따라와 그 어지를 들은 마시는 기가 막혀 땅을 쳤다.
‘폭군아! 정무를 저리 신속하게 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런 사악한 결정은 너무도 신속하구나!’
은파패가 우물쭈물하며 아뢰었다.
신은 아직 문서로 어지를 받지 못하였사옵니다.”
주왕은 바로 붓을 들어 봉황지에 두 글자를 꾹꾹 눌러썼다.
“행형(行刑)”
마시는 또 생각했다.
‘쓸데없이 명필이다!’
은파패는 어지를 받자 힘이 나서 오문을 향해 가는데 오문 앞에서 맨 먼저 기다리는 것은 황비호였다.
“은파패! 뇌개! 태자를 포획한 공로 축하한다! 전하를 죽이면 너희는 작위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위가 높아지는 만큼 목숨도 위험해지는 것을 아느냐?”
은파패가 뭐라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상대부 조계(趙啓)가 앞으로 뛰어나와 어지가 쓰인 족자를 잡아채더니 발기발기 찢어버리며 구간전이 떠나도록 소리쳤다.
“혼군(昏君)이 얼이 빠져서 무도하고 요녀와 필부들은 악을 조장하는데 누가 감히 어지랍시고 왕자전하들에게 칼을 댈 것인가?”
모두들 당황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였고 황비호는 네 명의 부장들에게 두 왕자를 철저히 감싸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백관들은 일제히 대전에 올라 종을 치고 북을 두드리는데 참으로 비장하고도 장엄한 장면이었다.
“저건 또 뭐냐?”
주왕의 말에 봉어관이 식은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문무관원들이 합세하여 폐하께서 대전에 오르시길 청하였사옵니다.”
주왕은 조금은 긴장한듯 달기를 보고 눈으로 물었고 달기는 물 흐르듯 대답했다.
“너무 놀라지 마옵소서! 백관들이 지금은 전부 저렇게 용기 있는 척들 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런 나약한 존재이지요. 오늘은 저들을 만나지 마시고 경거망동 말라는 어지만 전하십시오. 우선 왕자들을 베어 형을 집행하시고 내일 조회에서 만나시면 됩니다. 은장군에게는 빨리 일을 시행하고 보고하라 하십시요.”
사람 마음의 흐름을 다 꿰고 있는 달기인지라 판단이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봉어관은 어지를 들고 가서 백관 앞에서 전했다.
“조서에 이르노라! 경들은 역적을 돕고 악을 보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국가 정사에 관한 일이라면 내일 대전에 모여 처리하도록 하라.”
참으로 미묘한 어지였다. 백관들이 분분히 말들을 하였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형을 바로 집행하라는 어지가 따로 나간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은파패와 뇌개는 용봉검을 들고 두 왕자를 향해 조용히 다가서고 있었다.
은파패가 뇌개에게 속삭였다.
“이번에까지 미적거리다간 우리 목숨이 달려있네! 황비호 장군의 심복들이 왕자 곁에 지키고 있는 것 보이나? 내가 그들에게 이 어지를 펼쳐보이면 그들도 꿈쩍은 못할 걸세! 그때 아우가 바로 달려들어 두 왕자의 목을 치게! 알겠지?”
뇌개도 결심을 한듯 얼굴빛은 저승사자처럼 창백해지면서 입을 꾹 다물었으며 손은 칼자루를 힘주어 쥐고 있었다.
은파패는 네 부장들 앞에서 그 어지의 족자를 펼쳤고 행형(行刑)이라는 두 글자가 검은 빛을 뿜으며 드러났다.
“모두 어지를 받으시오! 함부로 행동하여 반역에 동참하지 말길 바라오!”
그가 말하는 동안 계획대로 뇌개가 칼을 뽑아들고 신속하게 그들의 뒤로 돌아가 왕자들에게 엄습했다. 은홍은 미약한 소리를 질렀고 은교는 동생을 감싸며 엎드렸다. 뇌개가 치켜든 칼이 그들의 몸을 가르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황비호의 칼끝이 뇌개의 목울대를 슬쩍 찔러 멈추게 하였다.
“너희가 정녕 내 손에 죽고픈 게냐?”
“지,지금 어지를 거역하시는 겁니까?”
마시는 이 격렬한 상황을 마주하고 하늘을 송곳으로 찌를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스승을 불렀다.
‘교수님! 교수님! 원시천존님!’
그 순간 마시의 몸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처럼 미세입자로 나뉘더니 어느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사람을 죽게 놔둠은 인정이 아니요, 사람을 살림도 자비가 아니니 하늘은 이 일을 어찌 풀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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